[광화문에서/박중현]‘디스(Diss)’가 일상이 될 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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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소비자 경제부 차장
박중현 소비자 경제부 차장
웬만한 막말은 화젯거리가 안 될 정도로 한국 사회가 막말에 익숙해져 가는 느낌이다. 케이블TV 예능프로 등에서 벌어지는 막말 달인들의 ‘욕 배틀’이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는 걸 보면서 골방에서 하던 PC게임이 스포츠가 됐듯 막말, 욕설도 호전성과 정묘함을 겨루는 ‘공식 스포츠’가 되는 날이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요즘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며 누리꾼들의 새로운 놀잇감으로 떠오른 젊은 래퍼들의 ‘디스 배틀’을 보면 그날이 벌써 코앞에 닥친 것 같다. ‘결례’라는 뜻의 영어 ‘disrespect’의 준말인 ‘디스(Diss)’는 상대방의 허물을 랩에 담아 공격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힙합 문화다.

지금은 국제스타가 된 가수 싸이가 2010년 내놨던 랩송 ‘싸군’에도 거친 내용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한줌의 잿더미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해서 어쩌니, 욕 들어 처먹어도 싸군” 등의 내용처럼 싸이가 디스한 대상은 대마초를 피우고, 병역법을 위반했던 과거의 어리석은 자신이었다. 같은 분야의 동료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아 막말이 오가는 최근의 디스 배틀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우리 사회 막말의 주산지인 정치권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디스 배틀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초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놓고 국회에서 질의하던 중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에게 “저게, 저게” “왜 째려보냐”라고 해서 물의를 빚었다. 민주당 측은 “‘저게, 저게’는 사람이 아니라 답변 태도에 대한 말이었고, 남 원장이 실제로 박 의원을 노려봤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박 의원은 전에도 새누리당 의원을 향해 “인간이야? 인간? 난 사람 취급 안 한 지 오래됐다”라고 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어 보는 이들의 시선이 고울 수 없었다.

역시 지난달 초 새누리당 청년 부대변인으로 내정됐던 인물은 예전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했던 막말이 문제가 돼 자진사퇴했다. 지난해 3월 한명숙 전 국무총리,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 이름까지 거론하며 “여자가 날뛰면 나라가 망한다” 등의 막말을 한 것이 사달이 됐다. 최근 새누리당은 2030세대를 대상으로 상금까지 걸고 ‘새누리를 디스해라! 막말 쌍욕 대환영’이라는 이색 공모전을 열기도 했다.

욕설이나 막말을 내뱉는 이는 카타르시스를 느낄지 몰라도 당하는 사람이나 주변의 스트레스 총량은 증가한다. 폐수를 배출하는 공장을 세워 돈을 버는 사람이 있을 때 나머지 사람들은 환경오염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외부 비(非)경제’ 효과나 마찬가지다. 전 사회의 정서적 외부 비경제를 유발하는 것이 바로 욕설, 막말이다.

디스가 게임이 되고, 막말이 일상화되는 사회에서 막말에 타고난 재주가 없어 일방적으로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 문제를 고민하다가 오래전 외국 잡지에서 읽었던 글에서 나 나름의 답을 찾았다. 내용은 이렇다.

1970년대의 어느 날 영국 런던 시내를 오가는 버스 안에 점잖은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다. 정류장에 차가 멈추고 금발의 젊은 여성이 버스에 올라 남성 옆에 섰다. 남성은 일어나 손짓으로 자리를 양보했다. 하지만 전혀 예상 밖의 반응이 나왔다. “전 제 발로 얼마든지 서서 갈 수 있어요. 제가 단지 숙녀(lady)라는 이유로 자리를 양보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요”라고 쏘아붙인 것. 그 여성은 당시 서구사회를 풍미하던 페미니즘의 신봉자였다.

당황스럽고 화가 날 법한 상황에서 중년 남성은 낮은 목소리로 여유 있게 답했다. “당신이 숙녀여서가 아니라, 제가 신사(gentleman)이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하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 횡행하는 막말과 ‘디스’에 분노가 치밀어 더 격한 막말로 대응하고 싶을 때 모두가 꼭 기억했으면 하는 이야기다.

박중현 소비자 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막말#디스#박영선 의원#소셜네트워크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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