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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19>청담 스님…“난 파계승이다. 정화 끝나면 처사로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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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19>청담 스님…“난 파계승이다. 정화 끝나면 처사로 살겠다”

동아일보입력 2011-11-28 03:00수정 2011-11-28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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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청담 스님은 생전 법문에서 “법을 구하고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자는 중생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성불(成佛)을 한 생 늦추더라도 중생을 건지겠다. 다시 생을 받아도 이 길을 다시 걷겠다. 육신은 죽어도 법신(法身)은 살아있다.”

비구승과 대처승의 대립 속에 불교 정화 운동을 이끌면서 대한불교 조계종의 기틀을 잡은 청담(靑潭) 스님(1902∼1971)의 말이다. 청담은 법호이며 순호(淳浩)가 법명이다. 25세 때인 1926년 경남 고성군 옥천사로 출가한 스님은 박한영 스님과 만공 스님을 사사했다.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회의장, 장로원장, 종정을 지냈으며 1971년 11월 15일 세수 70세, 법랍 45세로 입적했다.

나는 1950년대 중반 조계사와 선학원에서 스님을 만난 뒤 총무원 간부로 정화운동을 도우면서 오랜 시간 곁에서 스님을 지켜봤다.

참고 인내한다는 의미의 ‘인욕제일(忍辱第一) 이청담’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음은 나의 사형인 탄성 스님의 말이다. “비구 수백 명이 정화를 촉구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있던 경무대로 몰려갔다. 그러나 경찰의 봉쇄로 가지 못했고 조계사로 돌아왔다. 서로 화가 나서 책임을 묻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젊은 비구가 통솔을 잘못했다며 대뜸 청담 스님의 뺨을 때렸다. 그런데 청담 스님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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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도 있었다. 종정이던 동산 스님이 대처승 측과의 협상에 불만을 표시하며 청담 스님에게 “네 이놈, (넌) 대처승 편”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역시 변명도 없었고 표정도 바뀌지 않았다. 나중에 동산 스님은 “내가 성질이 급해 그랬네” 하며 미안함을 표했다.

청담 스님은 정화운동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나의 은사 금오 스님을 비롯해 동산, 성철 스님 등이 함께 정화운동의 씨앗을 뿌린 뒤 수행과 이런저런 이유로 산속으로 돌아갔다. 도심 한복판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마다하지 않고 끝내 정화의 꽃봉오리를 피운 분이 청담 스님이다.

헌칠한 모습의 스님은 금강경과 능엄경 법문이 특히 뛰어났고, 신바람이 나면 30분의 법문이 세 시간, 네 시간으로 길어졌다. 30대 중반일 때 당대의 대소설가인 춘원 이광수를 만나서는 일주일간 불교사상에 관한 격론을 펼쳐 춘원이 불교에 귀의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스님도 20대 초반 출가하려고 했지만 이미 처자가 있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가족사는 스님을 오랫동안 괴롭힌 고질이자 그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고리다. 있는 사실을 감춰 우상화하기보다는 언급해 스님의 뜻과 교훈을 읽는 게 낫겠다.

알려진 대로 스님은 출가 뒤 경남 진주의 속가를 찾았다가 유언이라며 가문의 대를 이어 달라는 노모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한다. 지옥에 갈 각오를 하고 하룻밤 파계를 한 스님은 참회를 위해 10년 세월 동안 맨발의 고행을 감행한다.

그후 청담 스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가 있다. 오대산에 머물던 스님은 속가로부터 딸을 낳았다는 전보를 받는다. 효도행(孝道行)을 위해 지옥행을 각오한 파계임에도 대를 잇지 못한 스님은 방성대곡하고 땅에 칼을 박아놓고 자결을 시도한다. 이때 오대산 원보산 스님이 ‘그 목숨을 불교를 위해 대신 써 달라’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훗날 청담 스님은 노모를 직지사로 모셔 출가하도록 했다. 하룻밤 파계로 얻은 둘째 딸은 성철 스님의 권유로 출가해 묘엄 스님이 됐다. 1971년 청담 스님 입적 뒤 묘엄 스님이 다시 속가 어머니를 삭발 출가시켜 청담 스님 집안에서 네 식구가 출가했다.

정화운동 초기 대처 쪽에서 청담 스님의 호적등본을 떼어 출가 뒤 낳은 아이가 있다는 것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정화를 이끄는 수장에 대한 공격으로, 비구 쪽에서는 몹시 난처한 일이었다. 젊은 스님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쌓였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젊은 스님들 앞에서 “맞다. 난 파계승이다. 정화가 끝나면 난 뒷방으로 돌아가 참회하며 살겠다”고 선언했다. 순간, 그 자리는 얼어붙은 듯 침묵이 감돌았고 이후 스님들 사이에 시비가 없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다. 당시 청담 스님의 위치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당대의 어느 누가 이처럼 솔직하고 파격적일 수 있겠는가.

나는 스님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아마 혁명가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철저한 수행과 뛰어난 법문,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인내, 남의 허물을 인정하는 그릇까지 세상을 바꿀 자질을 두루 갖췄다. 불교계의 시각에서 청담 스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큰 복이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0>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종정을 지낸 청담 스님의 충격적인 종단 탈퇴 선언과,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와의 인연을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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