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한국病이다]<4>‘한국정치 닮은꼴’ 대만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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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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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난동 세계챔피언’ 대만… 전투방법은 한국서 배웠다

“여의도가 아닙니다” 대만 입법원(의회) 본회의장에서도 한국 여의도를 그대로 옮긴 듯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2007년 5월 8일 다수당인 국민당 소속 왕진핑 입법원장이 예산안을 강행처리하기 위해 상정 의사를 밝히자 조끼를 맞춰 입은 민주진보당 소속 의원들이 육탄 저지에 나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동아일보DB
“여의도가 아닙니다” 대만 입법원(의회) 본회의장에서도 한국 여의도를 그대로 옮긴 듯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2007년 5월 8일 다수당인 국민당 소속 왕진핑 입법원장이 예산안을 강행처리하기 위해 상정 의사를 밝히자 조끼를 맞춰 입은 민주진보당 소속 의원들이 육탄 저지에 나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동아일보DB
《 지난해 7월 8일 대만 입법원(의회) 본회의장. 왕진핑(王金平) 입법원장(의장)이 단상에 올랐다. “대만과 중국 간의 경제협력기본협정(ECFA) 비준동의안을 2번째 강독(대만 의회는 의안을 3번째 강독한 뒤 표결 처리)에 부친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1야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 의원들이 서류와 물병 등을 단상을 향해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양안(대만-중국) 간 자유무역협정(FTA) 격인 ECFA 비준안 처리에 반대하는 민진당 의원들이 순식간에 단상으로 밀려왔다. 의장석을 에워싸고 있던 여당인 국민당 의원들과의 ‘활극’이 벌어졌다. 국민당의 한 의원은 야당 의석에서 날아온 시계에 맞았다. 단상으로 날아올랐던 민진당의 한 의원은 여당 의원들에게 밀려 떨어져 병원으로 이송됐다. 》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 같지 않은가…. 1995년 미국 과학잡지 ‘기발한 연구연보(AIR·Annals of Improbable Research)’는 ‘엽기 노벨상’인 ‘이그노벨상’ 수상자로 대만 의회를 선정했다. “정치인이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보다 서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통해 더 많은 걸 얻는다는 점을 증명했다”는 이유였다. 2009년 9월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인터넷판에서 역시 대만 의회를 ‘의회 난동 분야의 역대 챔피언’으로 묘사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월드팩트북’에 따르면 대만은 2010년 구매력지수(PPP)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5800달러로 한국(3만200달러로 45위)보다 높은 세계 33위다.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수준인 대만이 정치에서는 왜 이렇게 여의도 국회의 데자뷔(기시감·旣視感)를 느끼게 하는 걸까. 동아일보는 20∼24일 타이베이의 정치현장을 찾아 그들의 육성을 들어봤다.

○ 폭력에 빠져드는 의원들

몸싸움 나선 음악가 의원, 유학파 민진당 첸잉 의원(왼쪽) 몸싸움 반대 유단자 의원, 국민당 5선 차오얼중 의원(오른쪽).
몸싸움 나선 음악가 의원, 유학파 민진당 첸잉 의원(왼쪽) 몸싸움 반대 유단자 의원, 국민당 5선 차오얼중 의원(오른쪽).
대만 의원들은 의회 폭력이 정당 차원의 구조적인 문제여서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휩쓸리게 된다고 하소연했다. 민진당 첸잉(陣瑩·39·여) 의원은 비례대표로 2005년 원내 진출한 뒤 되도록 물리적 충돌에는 가담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미국 일리노이대 음대 박사과정을 밟으며 바로크 음악을 전공한 유학파이자 가죽바지에 부츠를 신을 만큼 패션을 중시하는 신세대 의원이다. 하지만 첸 의원은 지난해 3월 어쩔 수 없이 말려든 몸싸움 도중 다른 의원의 팔을 물었다. 첸 의원은 “누군가가 내 목을 눌러 숨이 막혀서 그 사람 팔을 물었는데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고 했다. 그는 “의원들 사이에 충돌이 생기면 서로 고소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내 경우엔 물린 (여당) 의원이 ‘첸 의원이 생선회를 좋아하는 모양’이라며 웃어넘겨서 문제가 더 커지지는 않았다”고 허탈하게 말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소수 야당으로서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게 첸 의원의 하소연. 그는 “국민당이 압도적인 다수 의석(총 113석 중 71석, 민진당은 27석)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가 있는 법안을 그냥 표결 처리해줄 수는 없지 않으냐”고 했다. 첸 의원은 그러면서도 2008년 민진당을 맡은 차이잉원(蔡英文·55·여) 주석이 ‘싸우는 민진당, 욕하는 민진당’에서 합리적인 당으로 체질 개선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국민당의 5선인 차오얼중(曹爾忠·57) 의원은 경찰대를 졸업하고 유도 1단의 유단자이자 태권도를 수련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싸우는 게 싫어 몸싸움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의원들이 별일 아닌데도 카메라만 들이대면 과도하게 행동하며 폭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꼬집었다.

차오 의원은 “소수당(야당)이 다수결에 따르지 않고 그렇게 몸으로 막으면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도 몸싸움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의장에게 경찰권을 부여하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피치 못할 상황에서 경찰권을 사용하지 않으면 계속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그는 “단상을 점거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의원에 대해선 의원 권한정지를 포함해 강력하게 처벌하는 규정을 신설해야 한다”면서 “폭력 의원들을 유권자들이 낙선시키는 문화가 정착되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 “대만 야당의 투쟁방식은 한국 정치권으로부터 큰 영향 받아”

대만 의회의 폭력은 국민당 일당독재 체제가 깨지는 계기가 됐던 1987년 계엄령 해제와 더불어 시작됐다는 게 대만 정치권 안팎의 대체적 분석이다. 정당 활동이 허용되면서 1986년 창당한 신생 민진당은 정부 여당에 강렬하게 저항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보해 나갔다는 것.

타이베이 중국문화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계엄령 해제와 그에 따른 정치변동을 지켜본 한인희 대진대 중국학과 교수는 “대만 야당의 투쟁방식은 한국 정치권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대만 외교부 초청으로 중국문화대에서 방문학자로 연구 중인 그는 “군사독재정권에 맞섰던 1987년 한국 민주화운동이 연일 대만 언론에 보도되면서 대만 야당이 전투방법을 배운 측면이 크다”고 설명했다. 민진당 지지자로 대만대 정치학 박사과정에 수학 중인 우전자(吳振嘉·38) 씨는 “대만의 의회 폭력은 국민의 관심을 끌고 쟁점법안 처리를 연기하기 위한 소수당의 정치적인 연기(performance)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 극한투쟁의 근본 이유는 중국과의 관계

대만의 의회 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지지층이 공고하게 갈려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장제스(蔣介石) 전 총통과 함께 1949년 전후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外省人) 출신은 통일을 지향하는 국민당을, 그보다 먼저 중국에서 건너와 살고 있던 본성인(本省人) 출신은 독립을 외치는 민진당을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양안관계)와 관련된 쟁점에서 극한투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학 강의시간에 자신의 정치성향을 밝히거나 다른 사람의 성향을 묻는 일이 금기시될 만큼 양안문제는 과거 극심했던 한국의 지역감정만큼이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다.

왕예리(王業立) 대만대 정치학과 주임교수는 “양당의 충돌은 양안관계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게 맞다. 두 정당이 대중을 동원할 때도 이를(통일이냐, 독립이냐를) 이용하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만대 대학원생(정치학 박사과정)은 “국민당이 당장 통일하자는 것도 아니고, 민진당이 조만간 독립하자는 것도 아닌데 의회에서 불필요한 폭력을 행사하는 후진적 행태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타이베이=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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