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광장을 가다]<4>미국 워싱턴 내셔널몰

  • 입력 2009년 7월 27일 02시 57분


美 민의의 집결장… 年 2500만명이 찾는 ‘워싱턴의 얼굴’

1922년 링컨기념관 완공으로 골격 완성

킹 목사 연설-오바마 취임식 열린 역사현장

대형박물관들 즐비… 1년내내 행사 줄이어

《미국 워싱턴 시민인 크리스 슈나이저 씨(36·건축업)에게 내셔널몰은 ‘천의 얼굴을 가진 도시 생활의 벗’이다. 매일 퇴근 직후인 오후 5시 반이면 조깅복으로 갈아입고 백악관 서북쪽에 있는 아파트를 나서 몰을 향해 뛴다. 길이 3km, 너비 300∼500m 직사각형의 잔디광장인 몰을 한 바퀴 도는 코스를 택할 수도 있지만 주로 몰의 서쪽 부분인 ‘링컨기념관∼타이들베이슨’ 코스를 달린다. 워싱턴모뉴먼트에서 속도를 내기 시작해 포토맥 강이 등 뒤로 흐르는 링컨기념관을 지난다. 각국에서 온 남녀노소 관광객, 웃통을 벗고 뛰는 청년들, 핫팬츠 차림의 늘씬한 여성들….》

매일 마주치는 풍경들 속을 달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때쯤이면 그림 같은 호수인 타이들베이슨에 닿는다. 잠시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호수 건너 제퍼슨기념관을 보노라면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공사 수주 계약서 속에 묻혀 지내며 찌들어온 스트레스가 99%는 증발하는 듯 상쾌함을 느낀다.

주말이면 광장은 두 아이와 함께 찾는 교육장으로 변신한다. 1년 내내 광장 한쪽에선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지난달 말 광장에서 열린 ‘스미스소니언 민속축제’ 때 슈나이저 씨는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고향 에콰도르의 민속 음식 맛과 라틴음악 공연을 보여줬다. 이달 4일 독립기념일 밤엔 광장에서 솟아오르는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해마다 봄이면 타이들베이슨 일대에 만개한 벚꽃 속을 달리고, 때론 벚꽃 관광객 속에 섞여 ‘사케 시음회’에도 참가한다.

내셔널몰은 때론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는 슈나이저 씨의 가슴마저도 울렁거리게 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올 1월 20일 오전 8시 집을 나선 그는 광활한 광장을 발 디딜 틈 없이 메운 인파 속에서 성조기를 흔들며 ‘역사의 한 페이지 속에 직접 들어와 있다’는 감격을 느꼈다.

슈나이저 씨는 “내셔널몰은 우리 가족에게 운동장이자 휴식처이고, 놀이공원인 동시에 교육장”이라며 “워싱턴을 세계의 정치 수도라고 하지만 사실 내셔널몰이 없었다면 아무 특색 없는 그저 그런 회색 도시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내셔널몰은 그 기능을 한마디로 규정짓기 어려운 ‘다(多)기능 복합공간’이다. 링컨기념관(광장 서쪽)에서 의사당(광장 동쪽) 사이에 펼쳐진 125만 m²의 잔디광장 양쪽엔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형 박물관들이 자리 잡고 있다. 자연사박물관, 항공우주박물관, 민속박물관 등 대부분 무료로 개방되는 대형 교육장이다.

광장 서남쪽 모퉁이의 한국전쟁기념관, 베트남전쟁기념관 등에는 미국 역사의 굽이굽이가 그대로 담겨 있다. 링컨기념관, 워싱턴모뉴먼트, 의사당 등 워싱턴을 상징하는 건축물들이 광장 가로 중앙의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다. 몇 블록만 벗어나면 백악관, 홀로코스트추모박물관, 제퍼슨기념관, 타이들베이슨 등 워싱턴의 관광명소가 내셔널몰을 중심으로 집중돼 있다.

이런 형태의 광장 콘셉트는 18세기 말 포토맥 강 동쪽 연방정부 소유의 땅을 미국의 수도로 설계한 ‘건국의 아버지’ 시대부터 싹터 왔다. 이후 1901년에 워싱턴 개발을 위해 구성된 맥밀런위원회가 광장 건설을 핵심으로 하는 도시계획을 만들었다. 당시 불었던 도시 건축 혁신 운동인 ‘아름다운 도시 운동’도 영향을 미쳤다. 일부 정치인의 반대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적지 않은 차질을 빚었지만 1922년 링컨기념관 완공을 끝으로 내셔널몰의 골격이 거의 완성됐다. 현재 미 연방정부는 광장을 이용객, 방문객 친화 공간으로 리모델링하면서 환경을 보호할 방안도 만들고 있다.

이처럼 시민의 휴식처이자 한 해 2500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인 내셔널몰은 세계의 정치 수도 워싱턴의 한복판이라는 지리적 상징성에 힘입어 역사의 새 장을 여는 민의의 집결장 구실을 해왔다. 1963년 마틴 루서 킹 목사는 광장에 모인 30만 군중과 함께 “옛 노예주의 자녀들과 노예의 후예들이 함께 식탁에 앉아 우정을 쌓는 세상을 만들자”는 꿈(I have a dream)을 역설했고, 46년 후인 올 1월 200만 명의 시민은 같은 장소에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의 취임을 지켜봤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당시 의사당 취임식장과 잔디광장의 분위기를 비교해 보면 광장의 의미가 더 확연해진다. 당시 취임식장의 정관계 재계 유력 인사들은 정장을 입은 채 엄숙한 태도로 취임식을 지켜봤지만 광장을 가득 메운 일반 시민들은 영하의 날씨 속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 “우리가 해냈다(Yes, We Did)”를 외치며 웃고 울고 노래했다. 광활한 땅 위에 잔디를 심어 만든 광장에서 희망의 씨가 뿌려지고 싹터, 열매를 맺어 온 것이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질서 약속해야 집회 허가

어기면 다신 신청 안받아”

애덤스 국립공원국 대외협력담당관

“내셔널몰은 광장 이용 신청자만을 위한 게 아니라 모든 미국인의 것입니다.”

미국의 수도 한복판에 있는 내셔널몰 광장에선 거의 매일 다양한 행사와 집회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 찾아가 봐도 잔디가 잘 보전돼 있으며, 역동성은 넘치지만 질서가 유지된다. 도대체 어떻게 관리를 하는 걸까.

20일 포토맥 강가에 있는 국립공원국 관리사무소에 들어서자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게시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게시판에는 7월의 날짜별로 여러 장의 종이가 붙어 있었다. 종이마다 허가된 행사의 이름 및 지정 장소 등이 적혀 있었다.

국립공원국 테리 애덤스 대외협력 담당관(사진)은 “광장 사용 허가는 선착순 접수를 원칙으로 한다”며 “신청인들이 와서 게시판을 보면 자신이 원하는 날짜에 이미 얼마나 많은 행사가 예정돼 있는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광장에서 집회나 행사를 계획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곳을 방문해 자세한 행사계획을 제출해야 한다. 대통령도 예외가 없다. 그러면 3∼5명의 담당 직원이 정밀한 심사를 거쳐 허가 여부를 결정한다. 한 해 3000건가량을 허가해 준다. 만약 몰의 시설물 훼손, 폭력, 신청서에 기재한 행사 계획을 어긴 전력 등이 있으면 거부된다. 물론 실제로 광장에서 집회를 열면서 폭력이나 시설물 훼손을 하는 단체는 거의 없어 기각률이 높지는 않다는 설명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집회 신청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애덤스 담당관은 “우리는 오로지 광장의 보호와 질서 유지에만 초점을 두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나 내무장관이라 해도 허가 결정 과정에 절대 개입할 수 없다. 모든 과정이 공정하고 편견 없이 이뤄지는걸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 매우 독립적으로 결정한다. 행사 계획이 크고 참가 예상인원이 많을 때는 심의과정에 공원경찰국 대표를 참여시킨다. 군중이 얼마나 될지, 공원경찰의 통제가 가능한 수준인지, 시설물 보존에는 문제가 없을지…. 신청자에게 그런 우려사항들이 다뤄지고 해결되어야만 허가를 내줄 수 있다고 말해준다. 실제로 그런 우려가 해소되어야만 허가가 난다. 매우 신중한 프로세스가 진행된다.”

국립공원국 측은 잔디 등 시설물 훼손 예방도 철저하게 한다. 신청할 때 일정 액수의 보증금을 받아두고 만약 시설물이 훼손되면 행사 뒤에 공문을 보내 ‘다음에 또 광장을 이용하고 싶다면 시설물 보호를 위한 장비를 준비해 오라’고 요구한다. 손해배상도 청구한다.

애덤스 담당관은 이 대목에서 “내셔널몰은 모든 미국인을 위한 공공지역이다. 이용 신청자뿐 아니라 모든 미국인의 권리가 보호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또 “만약 신청서에 기재한 사항을 어기거나 거짓 신청을 한 것으로 밝혀지면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음에는 광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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