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님 ‘퉁명화법’ 아웃!

  • 입력 2009년 7월 21일 02시 57분


“원고 골탕먹이려 그랬나” 피고 말 자르고 직설화법
“뻔한 사실 왜 들먹거리나” 변호인에 반말투로 핀잔
법원, 전문가 모니터링 의뢰
말투 등 점수매겨 평가-교정
본보, 프로젝트 전과정 참여

20일 오전 10시 5분 서울남부지법의 한 민사재판 법정. 당초 재판은 9시 50분부터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재판장(법관 경력 19년차)과 두 배석판사(5년차 미만)는 15분가량 늦게 법정에 들어섰다. 생업을 뒤로하고 법정에 출석해 있던 사건 당사자 20여 명은 연방 시계를 들여다보며 순서를 기다렸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못했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이 재판장은 사건 당사자들이 중언부언할 때마다 말을 끊어가며 핵심 쟁점을 콕콕 짚어냈다. 주택구입 계약금과 중도금을 냈는데도 소유권이전 등기를 해주지 않아 소송까지 이른 사건에서 피고 측인 집주인이 이런저런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자 재판장은 “계약 후 집값이 오른 것이 약 올라 일부러 원고를 골탕 먹이려는 것 아니냐”며 핀잔을 줬다. 피고가 우물쭈물하자 “이 사건은 조정으로 끝내겠다”며 말을 가로막았다.

또 회사 간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는 30대의 젊은 변호인이 이미 지난 재판 때 정리된 문제를 다시 따져 묻자 “이제 와서 뻔한 사실을 왜 또 들먹거리느냐”고 일축했다. 이 재판장은 사건 당사자들이 쟁점에 벗어난 얘기를 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아니, 그건 말이죠∼”라며 말을 끊었고 젊은 변호인에게는 종종 반말 투로 대했다.

이날 이 재판부가 진행한 20건가량의 재판을 모니터링한 이상철 성균관대 학부대학 교수는 “재판장이 직설화법을 주로 쓰는 데다 ‘편히 앉으세요’ 등의 인사말에는 인색하다 보니 듣는 사람이 경직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주미숙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스피치 클리닉 교수는 “재판장의 말이 빠르고 음이 높은 데다, 표정 변화가 없고 발음이 부정확해 듣는 사람이 불편하다”고 덧붙였다. 박교선 변호사는 “재판장이 무뚝뚝해 처음 본 사람은 고압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재판장으로서 쟁점 정리를 잘해 재판 진행이 빠르고 원활했다”고 평가했다.

이들이 이날 재판을 방청한 이유는 법원행정처가 마련한 ‘바람직한 법정 언행과 효율적인 법정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연구’를 위해서다. 법원행정처는 법관들의 고압적인 법정 언행으로 인해 재판 당사자들의 불만이 자주 제기되자 지난달 외부 연구용역을 발주했고 이상철 교수팀이 연구를 맡게 됐다.

이 교수팀은 이달 초부터 ‘법정 언행 개선 프로젝트’에 참여를 신청한 수도권 지역 법원 10개 재판부를 대상으로 1차 법정 모니터링에 들어갔다. △발음 및 태도 △법정소통 및 리더십 △쟁점정리 능력 △당사자 또는 변호사 입장 등 100여 개 평가 항목에 1∼5점씩 점수를 매기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재판부별로 상담과 교육을 실시하고 얼마나 고쳐졌는지를 보기 위해 2차 모니터링을 한다. 연구 결과는 앞으로 법관 연수교재로 쓰인다. 동아일보는 이 교수팀과 함께 이번 프로젝트의 전 과정에 참여할 예정이다.

함윤식 법원행정처 민사정책심의관은 “법정 모니터링 외에도 법정 언행 연구반을 만들어 법관과 변호사들을 상대로 올바른 구술 방법에 대한 홍보를 지속적으로 펼쳐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유혜진 인턴기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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