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서 제2인생 ‘파란눈의 평양시민’ 젠킨스

  • 입력 2009년 7월 17일 19시 08분


찰스 로버트 젠킨스 동아일보 자료사진
찰스 로버트 젠킨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일본 서부 해안가의 섬 사도에 있는 작은 기념품 가게. 한 노인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자 줄을 서서 그를 기다리던 관광객 십여 명 사이에서 반가운 탄성이 터졌다. "젠킨스 씨가 오셨다!" 곧이어 그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지고 사인을 해달라는 요청이 밀려들었다.

이 작은 기념품 가게의 스타는 찰스 로버트 젠킨스 씨(69). 그는 40년 가까이 '파란 눈의 평양 시민'으로 살다 2004년 북한을 빠져나와 일본에 정착한 외국인이다. 젊은 시절 한 순간의 '철없는 결정'으로 지옥 같은 생활을 경험한 그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그가 일하는 가게는 관광 명소가 됐다. 16일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일본에서 '제2의 인생'을 찾은 젠킨스 씨의 극적인 삶을 전했다.

1965년 한국 비무장지대(DMZ)에서 근무하던 24세 주한미군 청년 젠킨스 씨는 어느 날 밤 북한 국경을 넘었다. 예정대로 베트남 전에 파병되면 죽게 된다는 두려움 속에 맥주 10캔을 마시고 감행한 탈영이었다. 냉전시대에 제 발로 들어온 미국인을 저당물로 잡은 북한은 그를 체제 홍보용 영화 출연을 비롯한 각종 선전선동에 내세웠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에 대한 각종 사상 교육을 강요했다. 북한군은 "몸에 새긴 미군 문신을 없애야 한다"며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문신 제거 수술을 받았다. 외국인으로서 특별 대접에도 불구하고 구타와 감시, 식량 부족 등으로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상태"가 계속됐다고 그는 회상했다.

1978년 피랍 일본인인 소가 히토미 씨와 결혼해 두 딸 미카와 브린다를 얻은 그는 2004년 일본 정부의 북한 내 피랍 일본인과 가족 송환정책 덕분에 39년간의 북한 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히토미 씨가 먼저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탈영병으로서 본국에서 받게 될 처벌이 무서워 북한 탈출을 주저하던 그는 일본 정부의 도움으로 아내와 제3국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극적인 상봉을 한 뒤 일본행을 결심했다. 주일 미군사령부에 의해 탈영과 이적행위 등의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됐지만 30일 구류라는 관대한 판결을 받았다.

젠킨스 씨는 현재 사도 섬에서 자신의 첫 저서 '마지못해 된 공산주의자(The Reluctant Communist)'에 이은 두 번째 책을 준비하며 때때로 모터사이클을 즐기는 평온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 관광객들과 하루 300장이 넘는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도 모자라 실물 크기의 사진을 매장에 세워놔야 할 만큼 인기도 높다. 20살이나 어린 일본인 아내와 국경을 뛰어넘는 로맨스는 일본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북한 정보요원에게 다시 끌려가는 악몽을 꾼다. 혹시나 북한 스파이가 자신을 감시하지 않는지 주변을 살피는 게 습관이 됐다. 그는 "나는 북한을 그 어느 누구보다 잘 아는 외국인"이라며 "살해당해도 상관없지만 북한으로 되돌아가는 것만은 싫다"고 말했다. 기아로 사망한 채 강에 내던져진 북한인들의 시체에 물고기들이 달라붙는 장면이 떠올라 생선회도 먹지 못한다. 일본어가 서툴지만 북한의 세뇌 학습과 일방적인 암기에 진저리가 난 탓인지 "더 이상은 (단어를) 못 외우겠다"며 그는 한숨쉬었다. 그는 "이젠 영어보다도 한국어를 더 잘 한다"고 덧붙였다.

일본에 정착했지만 그는 여전히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는 낯선 이방인이다. 옛 전우들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철없이 탈영했던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도 떨쳐내지 못한다. 이 때문에 그는 "북한의 끔찍한 실상을 알려야 한다"며 신변을 걱정하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저술 활동과 언론 인터뷰를 계속하고 있다. 가족들이 "과거를 떠올리기 싫다"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닫을 때면 애완견을 상대로 북한에서의 기억들을 이야기한다. 그는 "북한에 억류돼 있는 미국 여기자 2명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며 "그들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김정일의 장단에 맞춰 꼭두각시 인형처럼 이용당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