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목숨 담보로 약값 흥정해서야…”

  • 입력 2009년 7월 16일 02시 57분


건보공단 - 제약사 갈등 때문에… 혈우병치료제 ‘노보세븐’ 끊긴지 두달
어제 조정위 2차 협상 결렬
“작은 상처도 지혈안돼 위험”
환자들 불안한 나날 보내

15일 오후 2시 반. 목발을 짚은 조상진(가명·59) 씨가 힘겹게 서울 종로구 계동 보건복지가족부 건물로 들어섰다. 구슬땀이 흘러내리는 조 씨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후텁지근한 날씨를 견디며 조 씨가 복지부를 찾은 이유는 이날 오후 3시 이 건물 9층 대회의실에서 조 씨의 생명을 ‘담보’로 한 갑론을박이 벌어질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목발만 빼면 조 씨의 외모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조 씨는 국내에서 2000여 명만이 앓고 있다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환자다.

“네 살 때인가, 친구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았는데 상처 부위가 탁구공만 하게 부어올라요. 이상하다 싶었지. 그런데 상처가 긁히면서 피가 나기 시작하는데….”

조 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피가 멎지를 않았어요. 아무리 닦아도 피가 계속 나와 놀란 부모님이 압박붕대로 머리를 칭칭 동여맸어요. 진물이 흐를 정도가 되자 피가 멈추더라고요. 그때 알았죠. 혈우병이라는 걸….”

혈우병 환자라고 해서 모두 조 씨처럼 증상이 심한 것은 아니다. 2000여 명의 국내 혈우병 환자 중 조 씨처럼 증세가 심한 중증 환자는 30여 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혈우병 환자들은 피가 나도 멎질 않아요. 그런데 더 위험한 건 뭔지 아세요? 중증 환자들은 자연출혈이 있어요. 멀쩡하게 있다가 갑자기 피가 나는 거죠.”

실제로 조 씨는 5년 전 허리를 숙였다가 왼쪽 허벅지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연 출혈이었다. 조 씨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허벅지가 부풀어 올라 압박붕대로 동여매고 한 달을 누워 있던 끝에 겨우 나았다”며 “지금까지 출혈로 위험했던 때를 세면 끝도 없다”고 말했다.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곧바로 혈변을 보고 하혈을 하는 탓에 조 씨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항상 마음 졸이며 지내야만 했다. 다행인 건 두 아들이 혈우병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유전병인 탓에 아이를 낳으면서도 걱정했죠. 이제 건강히 커서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고맙죠. 은퇴도 했고, 아이들과 함께 여행이라도 다니면서 지내고 싶지만 언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조 씨에게는 노보세븐이라는 치료제가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외국계 제약회사가 판매하는 노보세븐은 적은 주입량으로 빠른 지혈효과를 볼 수 있어 혈우병 환자들에게는 필수품이다. 그런데 이 생명줄이 두 달 전부터 끊어졌다. 지난해 6월 건강보험공단은 노보세븐의 약가를 45.5% 인하했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약값 책정의 기준이 되는 7개국의 노보세븐 가격과 국내 가격을 비교한 뒤 인하 조치를 했다”며 “당시 제약사 측은 자진 인하 형태로 이 조치를 받아들였지만 뒤늦게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약사 측은 “7개국 중 가격이 가장 낮았던 일본에서 노보세븐 약값이 올랐고, 지난해 경제위기로 환율이 올라 약값 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약값을 둘러싼 제약사와 건보공단의 갈등이 계속되면서 협상은 약제급여조정위원회로 넘어갔고 이 과정에서 제약사는 5월부터 노보세븐의 공급을 중단했다.

조 씨는 지난달 1일 왼쪽 무릎 연골 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노보세븐의 공급이 중단되면서 수술이 무기한 연기됐다. 지혈할 방법이 없기 때문. 그러나 조 씨는 “수술 못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자연 출혈이 발생하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병원에 가면 뭐해요 약이 없는데. 피가 안 멎으면…아시지 않습니까.”

조 씨가 노보세븐을 공급해 달라며 찾아다닌 곳은 이날 이 장소뿐이 아니다. 혈우병환우회 김영로 사무국장 등과 함께 14명의 조정위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눈물로 호소했다. 이 과정에서 무릎이 더 악화되는 바람에 조 씨는 예기치 않은 목발 신세까지 지게 됐다.

그는 “건강보험 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건보공단과 회사를 운영하는 제약사의 처지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환자들의 처지를 생각해서 한시라도 빨리 합의점을 찾아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라고 했다.

이날 약제급여조정위원회 2차 회의가 3시간 넘게 진행되는 동안 조 씨 외에도 혈우병 환자 5명이 초조한 표정으로 회의실을 지켰다. 하지만 이들의 바람과 달리 이날 협상 역시 결렬됐다. 위원회 측은 20일 3차 회의를 열고 결론을 내린다고 밝혔지만 환자들에게는 약이 없는 하루하루가 불안하기만 한 나날이다. 환자들은 “결정 전까지 임시로라도 약을 공급해 달라”고 했지만 제약사 측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정말 이러다 누군가 한 명 숨질 수 있다는 걸 저분들은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요?” 절규와도 같은 조 씨의 물음이었다.

:혈우병:

X염색체의 이상으로 혈액 내에 응고인자(피를 멎게 하는 물질)가 부족해 발생하는 선천적인 출혈 장애. 상처가 났을 때 일반인보다 피가 늦게 멎는다. 1만 명당 1명꼴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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