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랍 사태에서 한국이 얻은 것과 잃은 것

  • 입력 2007년 8월 29일 00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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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전체가 혹독한 성장통을 겪었다."

외교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28일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의 마지막 고비를 겪으면서 '한국인의 성장통'을 화두로 던졌다.

23명의 한국인을 탈레반 무장세력이 납치한 지 41일간 사실상 4500만의 한국인 모두가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특히 피랍자들이 종교적 배경을 안고 정부가 '여행 자제 요청' 지역으로 분류한 아프간을 방문해 현지 사회의 분위기와 부합되지 않는 행동을 하다 납치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종교적 논란이 일기도 했고 한때 '미국 책임론'으로 나라가 술렁이기도 했다.

피랍자 가족과 친지는 물론이고 인질들의 조기 석방을 위해 온몸을 던진 정부 당국자, 그리고 이번 사태를 취재한 수많은 언론인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마음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런 만큼 이번 사태는 한국인 모두에게 뼈에 사무치는 교훈과 새로운 자각을 줬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자신의 안전에 대한 각성 필요

정부 차원에서 볼 때 이번 사건은 인질 21명의 석방이라는 성과를 올렸다는 점과 함께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의 훼손을 무릅쓰고 한국인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탈레반과의 교섭에 임했다는 양면적 평가를 받는다.

일단 28일 발표대로 나머지 인질 19명이 석방될 경우 앞서 석방된 2명을 포함, 당초 억류됐던 23명 가운데 21명의 목숨을 건진 것은 나름의 성과로 평가된다.

비록 초기 대응체계가 완비되지 않았던 지난 달 25일과 31일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씨가 탈레반에 살해된 것은 씻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았지만 나머지 21명을 풀어낸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는 헌법에 명시된 해외의 우리 국민 보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테러단체인 탈레반과 직접 협상을 진행하는 등 국제 관례를 넘어서는 노력을 펼친 결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을 감행한 한국'의 이미지는 국제 외교가에 상당히 깊은 상처를 남길 전망이다.

국제사회의 불문율을 깸으로써 국제사회의 대 테러전쟁에 동참하고 있는 한국의 국격(國格)에 적지 않은 손상을 감수해야 했다.

비록 예정된 일이긴 하지만 탈레반과 협상의 결과로 연내 동의·다산부대 철군을 약속한 일이나 선교 금지를 약속한 것은 '권토중래'를 꿈꾸는 탈레반에게는 엄청난 전공(戰功)이라 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부 당국자는 피랍사태가 발발한 직후 한국인 23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정부가 나선 대가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 외교소식통도 "앞으로 한국인을 납치하면 한국정부가 적극 나선다는 인식이 퍼질 경우 그 파장은 엄청날 것"이라면서 "한국인 개개인이 자신의 안전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각성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인보다 훨씬 많은 해외 여행을 하는 일본인들이 비교적 국제적인 납치사건에 덜 휘말리는 것은 정부가 제시한 '권고사항'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기인한 것이라는 평가는 이제 더 이상 외면할 상황이 아니라고 당국자는 강조했다.

이번 사태이후 일반인들이 '재외국민 보호 의무를 무작정 정부에 떠넘길 것이 아니라 안전을 스스로 책임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인식에 공감하는 장면이 늘어난 것도 이런 측면에서 '얻은 것'으로 분류되는 대목이다.

◇이슬람에 대한 인식 넓혀야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이슬람권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무엇보다도 유일신(알라)를 모시는 이슬람 사회는 15세기 이후 유럽 기독교 선교단이 유일하게 선교에 실패한 지역이라는 점을 전문가들은 중시한다.

특히 오랜 서구 세계의 압박 속에 힘들게 생존투쟁을 전개해온 이슬람 사회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절실하다는 게 외교전문가들이 지적이다.

한국 외교는 지난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선출과정에서 대(對) 중동 외교에 주력해 상당한 효과를 봤다.

하지만 반 총장 선출이라는 현안이 있기까지 한국 외교가 중동 지역을 포함한 이슬람권에 기울인 노력은 세계 11위의 국력에 비교할 때 터무니없이 적었다는 인색한 평가를 얻고 있다.

특히 한·미 동맹을 축으로 한 한국 외교가 미처 챙기지 못한 사각지대인 이슬람권에 대한 외교적 접근노력이 절실하다고 당국자들은 입을 모은다.

28일 전격적으로 성사된 한국인질 19명의 석방합의 배경에 송민순 외교부 장관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의 주요 국가 순방을 통해 이슬람권에 '인질석방 여론'을 조성한 것이 상당한 효과를 거둔데서 입증되듯 일체감을 특성으로 하는 이슬람세계에 대한 외교력 강화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이슬람 문화에 정통한 국내 전문가는 "이슬람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약과 구약으로 실패한 기독교 사회에 알라의 믿음을 전파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만큼 기독교에 대한 우월감을 갖고 있다"면서 "종교나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할 이슬람권에 대한 접근은 애초부터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슬람의 이런 독특한 문화를 이해해 이번 사태 발생 직후 이슬람 인사들을 적극 활용했다면 조기 석방 등 결과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실제로 한국내에서 이슬람 선교활동을 하던 한국무슬림연맹(KMF) 관계자들이 지난주 파키스탄을 방문, 한국인 인질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점이 탈레반에 상당한 심리적 자극을 줬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국이슬람 서울중앙성원의 이행래 이맘(예배집전자) 등 3명으로 구성된 KMF 관계자들은 탈레반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파키스탄 급진 이슬람 정당 '자미아트-울-이슬라미(JUI)' 지도자인 마루라나 사미울 하크를 방문해 '인질 억류의 부당성'을 강조했다.

이행래 이맘은 "탈레반의 한국인 인질 납치로 3만5000명에 불과한 한국내 이슬람교도들이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며 "인질들이 석방되지 않을 경우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호소함으로써 이번 사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는 게 정부 소식통들의 평가다.

디지털뉴스팀·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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