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실로비키’의 나라

  • 입력 2007년 8월 27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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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를 통치하는 것은 푸틴이 아니다. 그것은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특유의 정서를 이어받은 연방보안국(FSB)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무력시위를 벌이며 북극해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러시아. 최근 러시아의 이같이 거침없는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FSB의 전신 KGB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 최신호가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는 2000년 KGB 출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후 새로운 엘리트 집단으로 급부상한 실로비키(제복 입은 남자들·KGB나 FSB 출신을 말함)가 ‘새로운 KGB 국가 건설’을 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KGB 특유의 정서란 국가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선택된 사람이라는 선민의식과 임무 수행을 위해 법을 어겨도 된다는 예외의식을 뜻한다.

1991년 소련 연방이 붕괴하면서 KGB도 조직 분리와 격하 과정을 거치며 해체 위기를 맞았다. 1995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절에는 FSB로 개편됐다.

옐친 대통령 시절 막후에서 권력을 휘두른 세력은 ‘올리가르히’였다.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쌓은 신흥 재벌들이다. 이에 반해 FSB 요원들은 월급도 제대로 못 받으며 올리가르히가 권력을 휘두르는 과정을 지켜보거나 조직을 그만둔 뒤 올리가르히의 사설 경호를 맡았다.

10여 년의 와신상담 끝에 실로비키는 푸틴 대통령의 집권으로 다시 ‘때’를 만났다. 이들은 올리가르히를 청산하고 크렘린 의회 정부부처 국영기업 등의 요직을 장악했다. 현재 러시아 고위관리의 4분의 1은 실로비키 출신이다.

특히 권력을 얻는 데 만족했던 KGB 시절의 실로비키와 달리 FSB의 실로비키는 부까지 거머쥐었다. 이고리 세친 대통령부 부장관은 러시아 최대 국영 석유회사 로스넵트 회장을 겸직했다. 또 다른 대통령부 부장관 빅토르 이바노프 씨는 군수업체 알마스 안테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FSB의 예비역들은 대기업에 파견돼 거액의 연봉을 받으며 회사의 의사 결정이 ‘국익’과 일치하는지 감시한다.

이러다 보니 과거 KGB도 ‘국가 안의 국가’로 불렸지만 이제 FSB는 국가 그 자체나 다름없다는 말이 나온다. 푸틴 대통령을 제외하면 FSB에 ‘아니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푸틴 대통령의 후계자를 결정할 집단도 실로비키라는 분석이다.

악덕 자본가인 올리가르히에 진력난 러시아 국민들도 실로비키에 대해서는 반감이 덜하다. 이른바 ‘스파이의 통치(spookocracy)’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실로비키의 권한이 막강해짐에 따라 조직도 한층 폐쇄적으로 변하고 있다. KGB가 널리 인재를 구했던 것과는 달리 FSB는 대부분의 실로비키 자녀들을 모은 FSB 아카데미에서 새로운 요원을 키운다. 이곳에서도 ‘무엇을 배우느냐’보다는 ‘누구를 아는가’라는 인맥이 중요하다. 실로비키 가문 간에 혼맥 쌓기도 성행한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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