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일본의 국가자폐증

  • 입력 2007년 8월 17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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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입니까?”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대형 서점이었다. 몇 시간째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서적만 뒤적이는 동양인이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다. “아닙니다, 한국인입니다. 한국은 일본 식민지였죠”라고 대답했다.

말 나온 김에 한마디를 보탰다. “일본은 전범을 기리는 시설에 총리가 참배합니다. 독일 같으면 생각 못할 일이죠.” 상대방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글쎄요, 독일은 연합군이 진격해서 점령해 버렸죠. 일본은 미국과 협상해서 전쟁을 끝냈으니까.”

“….” 예상 밖의 말이었다. ‘독일은 유대인 수백만 명을 죽였으니 죄질이 다르다’는 식의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아니었다.

당시는 유럽에서 2차대전이 끝난 5월이었다. 여러 신문, 잡지의 특집 기사에서도 ‘일본은 본토를 점령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해 국체(國體)를 보전했다’는 표현을 볼 수 있었다.

두 나라 모두 침략전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나치 독일은 완전 청산됐지만 일본은 일왕의 존재와 국가의 연속성을 유지했다. ‘전쟁은 어쩔 수 없었다’는 의식까지도 청산되지 않았다. 무엇이 이 같은 차이를 만들었을까.

혹자는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는 미국의 계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시의 치안 유지 필요성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공 보루’나 ‘치안’의 필요성은 독일(서독)이 결코 더 작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일본이 유대인 학살 같은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으니까…’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의 체제 청산은 전쟁범죄의 실상이 드러나기 이전에 결정된 것이었다. ‘죄질의 차이’보다는 협상력이 얼마나 남은 상태에서 항복했는지가 처리 방향을 갈랐다는 분석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 결과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독일과 달리 유력 정치가들이 전범들을 추모하는 일본은 주변국들의 두려움과 의심을 사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2일 인도 방문길에 라다비노드 팔 판사의 유족을 찾을 예정이라고 알려졌다. 팔 판사는 도쿄전범재판에서 11명의 판사 중 유일하게 A급 전범의 무죄를 주장한 인물이다. ‘종전기념일’을 맞아 ‘전쟁 당시 가해 책임을 깊이 통감한다’는 총리가 이런 일을 꾀하고 있으니 누구도 진심을 믿을 리 없다.

팔 판사가 엉뚱한 행동을 했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당시 신생 독립국 인도는 전 식민지 종주국인 영국과 관계가 편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석방한 인도인 포로들이 미얀마를 거쳐 ‘인도 독립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문제는 수많은 말 중에 듣기 좋은 말만 취하고 귀를 닫는 일부 일본 지도층이다. 11명의 판사 중 한 사람이 일본 A급 전범의 무죄를 주장했다고 해서 나치 전범들에 비해 그들의 죄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종전기념일’인 15일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보고 싶지 않은 것에서 눈을 돌려 버리면 편협한 역사가 돼 버린다’고 지적했다. ‘국제적 환경 때문에 전쟁에 돌입했고, 패했기 때문에 죄를 뒤집어썼다’는 믿음은 사실이라고 여기고 싶은 것만 믿는 ‘트루시니스(Truthiness)’일 뿐 진실(Truth)은 될 수 없다.

주변국의 충고에 귀를 닫고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한다면 이는 심각한 ‘국가자폐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일본은 언제 이런 지도층을 청산할 것인가.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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