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숨겨진 딸’ 또다시 논란

  • 입력 2007년 8월 16일 19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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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남북정상회담을 10여 일 앞둔 2000년 6월 초.

김은성 당시 국가정보원 2차장은 믿기지 않는 내용이 담긴 '통신첩보'(도청 내용 문서)를 받아들었다. 사안이 보통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해 곧바로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의 집무실로 뛰어가 "8국(과학보안국)에서 중요한 전문이 떴다"고 보고했다.

보고 내용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숨겨진 딸로 알려진 김 모(37) 씨가 한 신부와의 전화 통화에서 "모친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리자 신부는 "미사를 집전하겠다. 우선 병원에 안치시켜 놓아라"고 했다는 것.

임 전 원장은 "이런 상황에서 보안이 누설될 수 있으니 각별히 유의하라"고 김 전 차장에게 신신당부했다. 김 전 차장은 "확실히 할 테니 염려하지 마시라"고 말했다.

16일 입수된 검찰의 2005년 국가정보원 불법도청 수사기록에는 이 장면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당시 DJ는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계기로 유력한 노벨평화상 수상 후보로 떠오르고 있었다. DJ의 숨겨진 딸 문제가 외부에 알려지면 노벨평화상 수상에 '악재'가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DJ에게 정말 숨겨진 딸이 있었는지는 이처럼 국가 최고정보기관이 직접 도청을 하고 국정원장에게 직보를 해야만 했을 만큼 민감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김 씨가 DJ의 딸인지 그 진위는 공식 확인되지 않고 있다.

▽"통치권자의 사생활"=검찰의 수사기록에 따르면 김 씨에 대한 도청은 김 전 차장의 전임자였던 엄익준(사망) 전 2차장 때부터 시작돼 약 1년간 계속됐다. 김 전 차장은 업무 인수인계 과정에서 김 씨에 대한 도청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 전 차장은 "통치권자의 사생활과 관련된 것으로 극도의 보안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판단했다"며 "일반 업무를 제외하고는 내가 신경 쓰는 '현안 1호'였다"고 진술했다. 그 이유에 대해 "당시 노벨상 문제가 있는데 이것(김 씨의 존재)이 터지면 난리가 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 전 원장도 김 씨 관련 통신첩보보고서를 들고 간 김 전 차장에게 "밖에 이것이 나가면 큰 일 난다. 관리 잘 하라"고 지시할 만큼 '현안 1호'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김 전 차장은 말했다.

김 전 차장은 지난해 3월 국정원 도청 사건과 관련해 구속 기소된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에 대한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김 씨를 도청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대통령의 사생활과 관련해 모녀 관계인 2명 및 주변 인물을 도청했고 모녀에 대한 도청은 임 전 원장에게 '생첩보'(보고서 형태로 정리되지 않은 원문)로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이 같은 김 전 원장의 검찰 진술과 법정 증언은 임 전 원장이 도청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검찰 주장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김홍일 씨에게 "오빠"…김 씨와 DJ의 관계는?=김 씨의 존재는 2005년 4월 SBS의 시사프로가 추적 보도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DJ 측은 이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이후 지난해 3월 김 씨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DJ의 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사기록에는 김 씨가 DJ의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에게 "오빠, 오빠"하면서 전화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김 씨가 김 전 의원에게 돈을 요구했고 무기중개상인 조풍언 씨가 경제적인 도움을 줬으며, 조 씨가 미국으로 건너간 뒤부터 엄 전 차장이 김 씨를 관리한 것으로 돼 있다.

김 씨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수사기록에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다. 당시 수사팀에서는 임 전 원장이 도청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김 씨를 둘러싼 출생의 비밀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김 전 원장은 김 씨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중에 불만을 자주 터트렸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또 김 씨가 아파트 반상회에서 스스로 자신을 'DJ의 딸'이라고 밝혔고 김 씨의 모친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는 내용도 수사기록에 포함돼 있다.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모녀가 신경질적인 내용으로 통화했던 것도 있고 불안정한 상태를 보일 때가 있어서 국정원이 더욱 신경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특히 김 씨 모친의 자살 사실이 알려지면 여러 가지 억측이 나올까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DJ 측 최경환 비서관은 "김 씨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분명히 자기 아버지는 DJ가 아니라고 밝혔다. 본인이 스스로 밝혔는데도 왜 자꾸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김 씨는 DJ와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정원 사정에 밝은 한 법조계 인사는 "국정원이 어떤 조직인데 아무 근거도 없이 1년 동안이나 특정인을 도청하고 결과를 국정원장에게 즉시 보고하겠느냐"고 말했다.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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