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먼저 21세기에 가 계신다는 대통령의 국민 무시

  • 입력 2007년 5월 23일 22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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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조기숙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대통령은 21세기에 가 계시는데 국민은 아직 독재시대의 문화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21세기에 가 계신다는 노무현 대통령이 1월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담합한다”며 취재 경쟁에 피를 말리는 기자들의 명예를 짓밟았다. 노 대통령은 그러고도 모자라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게 될 기자실 통폐합과 취재원 접촉 제한 조치를 그제 강행했다. 대한민국의 21세기를 다시 독재시대로 되돌리려는 만용(蠻勇)이라고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취재 봉쇄 및 국민 경시(輕視)를 스스로 치켜세우는 정권 하수인들의 뻔뻔함도 가증스럽다. 국정홍보처는 ‘국정브리핑’을 통해 “정부가 공개할 것은 공개하고 비판받을 것은 비판받겠다는 다짐을 공식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언론 취재를 원천 차단해 국민이 알아야 할 사실에 대한 ‘공개’를 기피하고 ‘비판’을 막으려는 것이 이번 조치의 의도임을 모를 줄 아는가.

국정홍보처는 “기자들이 브리핑을 듣고 나서 좀 더 깊이 취재할 사항이 있으면 정책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면 된다”고 둘러댄다. 현 정부가 2003년 ‘개방형 브리핑제’를 도입한 뒤의 실상이 어떤가. 정부는 선전하고 싶은 것만 늘어놓고, 그마저도 통계 등을 왜곡하기 일쑤다. 또 기자들이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면 ‘시간이 없다’며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납세자인 국민이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안에 대해 심층취재를 하고 싶어도 방문 취재는 사실상 금지되고, 수십 명의 기자가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면 통화중 신호음만 들리곤 한다.

이번 조치로 기자실이 거의 없어지고 관청 사무실 취재가 극도로 제한되면 아무리 민완한 기자라도 국민의 알 권리를 제때 충족시켜 주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대통령이 ‘국민보다 앞서 21세기에 가 계시는 분’이란 말인가.

이번 조치는 노골적으로 기자의 정보 접근권을 차단하고 행정 비밀주의로 가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계적 관행’이란 주장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미국만 해도 정부 부처마다 기자실을 운영하고 있고 일본은 기자실이 800여 개에 이른다.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은 이번 조치에 앞서 언론단체와 학자 의견을 수렴했다고 했지만 이 또한 부정직하다. 한 언론단체장은 “한 번 만나 오히려 우려를 표시했다”고 밝혔다. 취재를 현실적으로 원천 차단해 놓고 국민의 알 권리 침해가 없다고 강변하는 김 처장이 현 정권이 끝난 뒤엔 어디에서 어떤 소리를 하는지 지켜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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