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자리 안 지켰다면 평생 부끄럽게 살았을 것”

  • 입력 2007년 5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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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항쟁 지도부가 있던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이경희 씨(오른쪽)와 김복희 씨가 상무대 영창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항쟁 지도부가 있던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이경희 씨(오른쪽)와 김복희 씨가 상무대 영창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5·18 당시 전남도청 남았던 이경희-김복희 씨

16일 오후 광주 서구 치평동 5·18자유공원 내 상무대 영창.

영창 안을 둘러보던 이경희(48·여) 씨와 김복희(46·여) 씨는 27년 전의 악몽이 떠오르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곳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게 붙잡힌 시민들이 갇혀 조사를 받던 곳.

쇠창살을 만지던 이 씨는 “공포에 질려 머리에 손을 올리고 오리걸음으로 영창 안으로 들어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7년 전 상무대가 옮겨간 뒤 복원된 영창에 처음 와 본 김 씨는 “모진 구타로 하루 종일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라며 “그때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맞서 싸운 시민군.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무력으로 진압되던 5월 27일까지 전남도청을 지켰던 ‘여성 투사’였다.

전남 목포에서 전문대를 다니다 휴학한 이 씨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광주에 왔다가 금남로 참상을 보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21일 오후 금남로에서 시민 수십 명이 계엄군의 총탄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차를 타고 다니면서 헌혈 방송을 시작했죠.”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던 27일 새벽 이 씨는 거리로 나섰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애절한 목소리는 계엄군의 탱크 소리와 총소리에 묻혀버렸다.

도청에서 300여 m 떨어진 적십자병원 앞에서 붙잡힌 이 씨는 군사법정에서 내란혐의 등으로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157일 만에 형 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김 씨는 “그때 그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면 평생을 부끄럽게 살았을 것”이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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