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이학수]21세기 거북선을 보고 싶다

  • 입력 2007년 5월 5일 03시 01분


코멘트
많은 인기를 끌었던 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함선이 나온다. 거북선과 판옥선, 협선, 사후선 등 종류가 다양했고 성능이 일본이나 중국 함선보다 우수했다. 왜군은 전쟁을 끝내고 귀국하려 했을 때 조선 수군이 길목을 지키자 두려워서 바다로 나오지 못하고 해안 근처에 성(왜성)을 쌓아 놓고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왜군에 일방적으로 몰렸던 육군과 달리 조선 수군이 일본과 싸워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군사과학 기술이 일본에 앞서 있었고 이순신 장군의 전략전술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과학기술의 우위는 거북선과 조선 화포로 증명됐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정부는 수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강력한 수군을 양성하려고 했다. 삼도수군이 통제영 바다에 모여 첨(尖)자 진을 펼치며 훈련하는 모습을 그린 병풍을 보면 당시의 해군력이 장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병풍에 그려진 거북선만 세어 봐도 40여 척이나 된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타고 일본군을 쳐부순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이 아니라 판옥선에 승선해서 부대를 지휘했다. 명나라 수군 지휘관도 전투 당시에는 조선 판옥선에 옮겨 탈 정도였다.

거북선은 조망에 한계가 있지만 대포로 무장하고 지붕을 철갑으로 입히고 철침을 꽂은 돌격함으로 화력과 기동력이 뛰어났다. 조선의 군사과학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건조할 수 있었던 선박이다.

화포는 고려 말부터 중국의 기술을 받아들여 실용화했는데 조선 초기에 오면 완전히 토착화된 기술로 만든 화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총통등록’이라는 기술 서적에는 화포 주조법과 화약 사용법이 기록돼 있다.

이때부터 우리는 규격화된 조선 화포를 대량으로 생산했고 전쟁이 벌어지자 나무화살, 쇳조각, 쇠구슬을 화포로 발사해 적에게 타격을 줬다. 불화살(신기전)을 100발씩 발사하는 이동식 화차를 발명해 실전에 배치하기도 했다. 과학기술의 뒷받침을 받은 강력한 수군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역사는 지금과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군사과학 기술의 변화는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온다. 임진왜란과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는 30년전쟁(1618∼1648년)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본격적으로 대포와 소총을 사용함으로써 기병과 창검에 의존했던 군대가 속수무책으로 패배했다.

2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창검과 활로 무장한 군대가 해체되고, 성벽과 요새를 중시한 방어전술이 일순간에 격파됐다. 이후 유럽의 절대왕조는 변화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상비군을 창설하고 관료제를 도입했다. 이 시기를 군사과학 기술의 혁명기라고 부른다.

조선 후기에 오면서 우리는 군사과학 기술과 수군의 우위를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 주민의 바다 왕래와 해상교역을 금지하고 섬을 비우는 ‘해금공도(海禁空島)’ 정책을 실시하는 바람에 해양력이 급속히 쇠퇴해 버린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독자적인 군사과학 기술은 모두 실종되고 수군은 흔적도 없이 해체됐다. 광복이 됐을 때 우리에게는 한 척의 함정도 없었다. 군사과학 기술과 강력한 해군의 전통을 상실하고 말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 해군은 비로소 우리의 첨단기술로 잠수함과 전투함을 건조했다.

5일 어린이날에는 경남 진해의 해군사관학교가 문을 활짝 열고 어린이들을 맞는다. 조선의 과학기술 현장에서 거북선을 직접 타 보고 화포를 손으로 만질 수 있다.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가 판옥선 모형과 총통을 직접 보면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면 좋겠다.

이학수 해군사관학교 교수 박물관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