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솔리다르노시치 25주년]<中>야루젤스키 장군과 국가이성
더보기

[솔리다르노시치 25주년]<中>야루젤스키 장군과 국가이성

입력 2005-11-15 03:08수정 2009-09-30 23:23
뉴스듣기프린트
트랜드뉴스 보기
폴란드의 최고 실력자에 오른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당 서기장은 1981년 12월 계엄령을 선포했다. 자유노조연대의 파업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폴란드 사태에 개입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사전 차단하려는 포석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당시 경찰과 대치한 자유노조연대. 동아일보 자료 사진

《폴란드 개혁이 성공한 또 다른 배경에는 파업 노동자와 협상에 응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의 비교적 온건한 정부와 현실을 직시한 합리적 대응이 있었다는 것도 밝혀둬야 될 것 같다. 파업은 물가고와 저임금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과 정부의 경제정책 실정에 대한 불신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악화일로를 걷는 생필품 공급 상황에서 1980년 여름 다시 육류 가격이 인상되자 불만은 절정에 달하면서 그단스크를 위시한 여러 도시에선 파업이 꼬리를 물었다.》

이때 종전과 다른 새로운 양상은 개별 공장, 기업을 넘어 모든 사업장이 연대(連帶)하는 ‘통합파업위원회’가 결성된 것이다. 그 위원회의 리더가 그단스크의 레닌 조선소 전기공 레흐 바웬사. 한편 많은 개별 노조가 ‘연대’한 통합위원회엔 처음으로 노동자와 지식인의 ‘연대’도 이루어졌다.

이해 8월 파업 노동자들은 바웬사가 이끄는 위원회를 정부의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라는 요구를 관철시켰다. 그것은 당의 승인과 비밀경찰의 감시하에서만 조직이 허용되던 동유럽에서는 전대미문의 일이다. 정부 대표와 노조 대표는 당으로부터 독립한 자유 노조를 인정한다는 그단스크 협정에 서명하게 된다. 당시 폴란드의 정부, 군부 그리고 당을 장악한 실력자가 야루젤스키 장군이었다. 그가 왜 이런 엄청난 양보를 했을까. 그는 어떤 인물인가.

1980년대 초 폴란드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늘 군복, 군모에 검은 색안경을 쓰고 TV에 등장한 그의 모습은 결코 호감이 가는 인상이 아니었다.

야루젤스키 전 폴란드 대통령(왼쪽)을 바르샤바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대담한 후 기념 촬영한 최정호 객원대기자. 1980년 바웬사가 이끄는 솔리다르노시치를 인정하는 ‘그단스크 협정’에 서명한 야루젤스키 장군은 이후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그 색안경에는 내력이 있다. 농장을 관리하던 귀족 아들로 태어난 그는 16세 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폴란드인과 함께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됐다. 그곳에서 부친을 잃은 그는 1943년 소련군 지휘하의 폴란드군에 지원한다. 폴란드 병사의 장비는 열악해 겨울 전투에 필수적인 스노글라스도 지급되지 않았다. 이때 야루젤스키 신병은 눈벌판에 반사된 태양빛에 망막이 상해 그때부터 항상 선글라스를 쓰게 됐다.

전쟁이 끝난 후 폴란드 참모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한 그는 33세에 별을 달고 국방차관, 합참의장, 당 중앙위원, 국방장관으로 출세가도를 달린다.

솔리다르노시치(노조 연대)와 대결하게 된 1981년엔 총리가 되고 같은 해 당 제1서기로 선출되면서 명실상부한 폴란드의 제1실력자가 된다. 1989년 민주화의 과도기에 대통령에까지 선출된 뒤 하야한 그를 이번에 바르샤바의 사무실로 찾아가 2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눴다.

―왜 자유노조를 받아들였느냐고? 길은 둘뿐이었다. 무력진압이냐, 협상이냐. 나는 협상을 택했다. 그러나 솔리다르노시치를 단순히 노동조합이라는 차원에서만 승인했을 뿐, 이 조직이 장차 ‘정치적인 파워’로 급변신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솔리다르노시치를 승인하지 않는다면 강제 진압의 길만 남는데 그건 원하지 않았다. 동유럽 제국의 과거(가령 1956년의 헝가리의 경우)와 비교될 만한 점이다. 폴란드에서는 유혈사태 없이 평화적으로 개혁을 추진해서 오늘의 상황으로 ‘소프트랜딩’할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나 혼자의 결단이 아니고 각료들의 합의된 의견에 근거한 것이다. 모두 다 현실론적인 입장에서 분명한 입장 표명을 해 주었다.

―그런데도 왜 계엄령(1981년 12월 13일∼1983년 7월 22일)을 선포했느냐고? 계엄령 선포로 이어지는 1년 반 동안은 나에겐 100년처럼 길게 느껴진 초조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물론 통제 불능의 1000만 명이 조직된 노조연대가 파업에 파업을 계속하는 동안 국가경제는 파탄지경이었다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보다 더 큰 무게를 갖는 배경으로 폴란드 사태가 다른 동유럽 제국으로 번질 것을 염려하는 소련이 브레주네프 독트린을 내세워 무력 개입할 개연성이 있었다는 걸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나는 그것만은 막아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그때 나도 몰랐던, 최근 밝혀진 사실로는 당시 소련은 실제로 10만 명의 군 병력을 폴란드 국경에 이동 배치하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는 야루젤스키 장군과 관련해 폴란드 현대사에서 가장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대목으로 이에 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관한 그의 여러 가지 구구한 설명으로 1시간 예정의 대담은 2시간으로 늘었으며 소련 군 배치에 관한 극비 도면의 사본까지 내게 보여 주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곧 출판될 그의 저서 ‘역류(Pod Prad)’에 상술해 놓았다던가.

요컨대 계엄령 선포가 당과 정부의 기득권 수호를 위한 방책이었느냐, 외세의 무력 개입으로부터 폴란드를 수호하기 위한 ‘국가이성’의 결단이었느냐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권좌에 있을 때나 하야한 뒤나 금욕적인 사생활과 높은 교양인으로 알려진 야루젤스키 개인의 품성을 문제 삼지는 않고 있다. 그의 방은 값싼 이케아식 책상 책장 소파 세트로 돼 있어 도무지 전직 대통령 사무실 같지 않았다. 노조 지도자 바웬사의 사무실보다 훨씬 검소한 사무실은 차라리 교수 연구실 같았다.

먼발치에서 일찍부터 그를 ‘해체의 영웅’이라 일컫던 평론가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1980년대 중반에 그를 만나 본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도 “야루젤스키는 손가락 끝까지 애국자”라 적고 있다. 그와 오래 얘기해 본 헬무트 슈미트 전 서독 총리도 “야루젤스키는 첫째 폴란드인이고 둘째는 군인이며 셋째가 공산당원이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의 과거를 추궁하는 재판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역사에 어떤 인물로, 어떻게 기록되길 바라느냐는 마지막 질문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밝혀 공정하게 기록되기 바랄 뿐”이라고 대답했다.

최정호 객원 大記者 바르샤바(폴란드)에서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주요뉴스

1/3이전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