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이데아의 동굴’…독선, 자멸을 부르는 씨앗

  • 입력 2005년 11월 12일 03시 01분


코멘트
고대 그리스의 권투 선수가 주먹을 가죽줄로 감고 싸우는 모습. 기원전 6세기경에 만들어진 그리스 항아리에 그려진 것이다. 아래는 스페인 작가 호세 카를로스 소모사.
고대 그리스의 권투 선수가 주먹을 가죽줄로 감고 싸우는 모습. 기원전 6세기경에 만들어진 그리스 항아리에 그려진 것이다. 아래는 스페인 작가 호세 카를로스 소모사.
◇이데아의 동굴/호세 카를로스 소모사 지음·김상유 옮김/380쪽·1만 원·민음사

‘역주(譯註)’란 번역자가 책 내용에 대해 다는 짧은 해설이다. 하지만 이 소설만큼 역주가 적극적이고 힘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이 소설 속의 역주는 파피루스에 쓰인 고대 그리스 소설 ‘이데아의 동굴’을 번역해 나가는 ‘나’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씩 알려준다. 번역을 해갈수록 누군가 몰래 방에 들어와 파피루스에 쓰인 내용을 바꾼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 든다. 심지어 글 속의 인물들이 번역자에게 “당신”이나 “번역자는 들으시오”라는 식으로 말을 거는 내용까지 들어있다. ‘이데아의 동굴’을 그리스 시대에 파피루스에 필사했던 몬탈로라는 이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는데 ‘나’ 역시 목숨의 위협을 느낀다.

그러면 ‘나’가 번역하고자 하는 ‘이데아의 동굴’이란 어떤 내용일까?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트라마코스라는 미소년이 온몸이 찢긴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는 플라톤이 세운 학교에서 오직 이성과 철학만이 진리이며 감정과 예술은 허상이라고 배워온 얌전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고대 스타일의 탐정인 헤라클레스가 캐보니 실제 그는 딴판이다. 밤마다 창녀를 찾아다니고, 조각가를 위해 누드모델도 됐고, 다른 소년들과 문란한 관계였다. 자연히 헤라클레스는 트라마코스의 친구들을 ‘수사’해 나가지만 이들도 차례차례 죽음을 당한다.

결국 ‘이데아의 동굴’이라는 그리스 소설의 내용과, 그 소설을 번역하는 이에게 벌어진 일들을 액자소설로 엮어 놓은 작품이 바로 스페인 작가 소모사(46)의 현대 소설 ‘이데아의 동굴’인 것이다. 다소 복잡한 이 같은 구성은 텍스트와 텍스트가 서로 영향을 미치는 포스트모던한 기법의 본보기라 할 만하다.

독자들은 ‘액자’ 안팎의 이야기를 오가면서 마치 나비가 허물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과정이 몇 차례나 반복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같은 이야기의 화려한 탈바꿈을 통해 작가는 독선에 갇힌 생각들의 폐악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플라톤의 이성주의든, 디오니소스의 쾌락주의든 저만 옳다는 독선은 결국 충돌과 비극으로 가는 게 아닐까. 중층적인 얼개와 지적인 담론들이 갈수록 깊이를 더하는 소설이다.

소모사는 쿠바에서 태어나 스페인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직 정신과 의사다. 갖가지 수상 경력이 있는 그는 이 소설로 영국과 스페인의 추리작가협회로부터 각각 골드 대거 상과 최우수 역사추리소설상을 받았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