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01년 이방자 여사 출생

  • 입력 2005년 11월 4일 03시 05분


코멘트
일본명 나시모토 마사코(梨本方子), 한국명 이방자(李方子·1901∼1989).

일본 왕족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의 비(妃)가 되었던 여인.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고 그 경계선에서 늘 흔들리며 살아야 했던 비운의 여인.

1901년 11월 4일 메이지(明治) 일왕 조카의 딸로 태어나 행복한 소녀시절을 보내던 마사코는 1915년경 일본 왕세자비의 최종 후보(3명)로 간택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불행의 시작이었다. 건강검진 결과 불임으로 판명나면서 후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놓고 다른 후보 측의 흉계였다는 말도 있다.

곧이어 당시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영친왕과의 정략적 결혼이 추진됐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사코와 결혼시켜 조선 황실의 대를 끊겠다는 일본의 의도가 깔린 것이다. 결혼식은 1920년에 치러졌다. 일본의 왕세자비를 꿈꾸던 한 소녀는 그렇게 망국의 황태자비 이방자가 된 것이다.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못한 삶은 고단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광복은 그에게 또 다른 고통이었다. 그는 일본의 왕족이 아니었다. 그저 재일 한국인일 뿐이었다.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조선의 황실을 인정할 수 없다”며 영친왕 부부의 입국을 거부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1963년 그는 영친왕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하지만 남편 영친왕은 이미 쓰러져 기억상실증과 실어증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생면부지의 한국 땅에서 그는 봉사의 삶에 나선다. 영친왕과 함께 1966년 신체장애인 재활복지재단인 명휘원을 설립하고 각종 봉사 모임을 만들어 장애인들을 위해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1970년 영친왕이 세상을 떠나자 주변에선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 남았다.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들을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89년 5월 11일 그는 낙선재에서 삶을 마감했다. 올해 7월 낙선재에서 그의 둘째아들 이구(李玖) 씨의 장례가 치러지면서 그의 이름이 다시 오르내렸다. 모두들 그를 비운의 여인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여기에 덧붙일 것이 하나 있다. 어려움을 딛고 봉사의 길을 걸었던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사실을.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