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첫 여성대법관의 ‘大法생활 1년’

  • 입력 2005년 8월 22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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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대법관이 집무실에서 재판 기록을 읽고 있다. 대법관 한 사람이 1년간 주심으로 처리하는 사건은 1700여 건. 김 대법관은 “하루라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어 휴일이 따로 없다”고 말한다. 대법관 사무실이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권주훈 기자
김영란 대법관이 집무실에서 재판 기록을 읽고 있다. 대법관 한 사람이 1년간 주심으로 처리하는 사건은 1700여 건. 김 대법관은 “하루라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어 휴일이 따로 없다”고 말한다. 대법관 사무실이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권주훈 기자
《지난해 8월 25일 대법관 생활을 시작한 김영란(金英蘭·50) 대법관.

그의 대법관 임명은‘사상 최초의 여성 대법관’에다 사법시험 기수를 몇 단계 뛰어넘는‘서열파괴’였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그는 자신이 원하건 원치 않건 한국 사법사와 여성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는 또 소수자와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그들의 인권과 권리에 특히 많은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그의 대법관 1년은 어떤 모습이었고, 그의 삶과 노력은 법원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임명된 날 하루만 좋았다”=11일 오후 대법관 집무실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대법관보다는 오히려 연구원에 가까웠다. 그는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기록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부임 다음 날 선배들의 말씀이 실감이 났어요.” 그가 대법관에 임명됐을 때 선배 대법관들이 건넨 첫마디는 “오늘 하루만 좋아하세요”라는 말이었다.

김영란 대법관의 집무실 책상 옆에 걸려 있는 그림. 마을 어른이 동네 사람들의 다툼을 중재하는 조선시대 재판을 묘사한 이 그림은 남편인 강지원 변호사가 대법관 지명 소식을 듣고 “대법관의 삶과 닮았다”며 집무실에 걸어 놓으라고 준 것이다.

대법관은 법관에겐 최고의 명예지만 업무에 대한 부담이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심하다. 대법관 1명이 주심 대법관으로 처리하는 사건 수는 연간 1700여 건.

김 대법관은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 퇴근할 때까지 30분 남짓 구내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기록 검토를 한다. 퇴근해서도 저녁 식사와 집 근처 헬스클럽에서의 운동, 잠깐 동안의 TV 드라마 시청과 독서를 제외하곤 밤 12시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기록 검토를 쉬지 않는다.

남편인 강지원(姜智遠·55) 변호사는 대법관 아내의 이런 생활에 대해 안타까움이 많다.

“낮엔 사무실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오고, 집에선 식탁에서든 소파에서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록과 보고서를 검토해요. 하도 뭘 많이 보니까 각막염 증세가 끊이질 않아요.”

하지만 그는 ‘살인적인’ 업무량보다 ‘내가 판결을 내리면 끝’이란 압박감이 더 크다고 했다. 1991년 한 대법관이 과로와 스트레스로 지병이 악화돼 임기 도중 별세한 일은 그의 말을 짐작하게 했다.

▽달라진 일상, 평범한 생활=김 대법관은 얼굴이 많이 알려져 일상생활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티셔츠를 입고 장을 보러 가도 알아보는 분이 너무 많아요. 원래 물건값을 깎지 못했지만 이젠 정말 못하게 됐어요.”

그는 고교 3학년인 둘째 딸과 영화나 전시회를 보거나 평소 좋아하는 떡볶이를 사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했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박찬욱(朴贊郁)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수험생(고교 3학년)과 영화나 전시회를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나름의 생각이 있는 것 같아 공부에 간섭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동네 아줌마의 시각으로”=그는 2년마다 열리는 세계여성법관회의를 2010년 또는 2012년 서울에서 유치하는 일을 준비 중이다. 그는 “한국 사법부의 수준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바람도 있다고 했다. “내년 9월까지 13명의 대법관 중 9명이 바뀌잖아요. 또 한 명의 여성 대법관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1년에 1700건의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고단한 대법관의 삶.

남편인 강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김 대법관은 우리 동네 아줌마 그 자체예요. 평범한 사람의 보통 시각으로 세상의 일을 보고 느끼고 판단합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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