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황인숙(47) 씨가 중진 사진작가 김기찬 씨와 함께 만든 책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샘터)에 쓴 ‘작가의 말’의 한 대목이다. 황 씨가 요즘 함께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사진작가다. 그는 젊은 사진작가 다섯 명과 함께 ‘나 어렸을 적에’(진디지털)라는 사진 산문집도 펴냈다. 10년이나 20년 전쯤에 살던 어린이들의 얼굴과 미소, 목소리, 그들이 뛰어 들어가 놀던 개울물을 아프도록 그립게 떠올리는 책이다.
“그때 나는 세계가 둘로 갈라져 있는 줄 알았다. 사람이 사는 한강 이쪽 세계와 모래밭과 숲과 저수지만 있는 한강 저 너머 세계. 두 세계가 오직 그 나룻배로만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좀 더 큰 다음, 강 건너 숲 사이를 한참 걸어 들어가 초록 펌프가 있는 초등학교를 발견했을 때의 신기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나 어렸을 적에’)
“콸콸콸, 비탈과 계단 길을 쓸어내리는 빗물소리는 산동네 사람들의 시름도 같이 씻어 준다. 산동네에 살면 비가 오는 것을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다. 배수 문제와 침수에 대한 걱정을 벗고 사는 것은 산동네 사람들의 작은 행복이다. 산동네에는 계단이 많다. 계단은 아이들에게 즐거운 구조물이다. 한없이 뻗어 있는 계단을 보면 칸칸이 층층이 그 계단을 딛고 올라오시라는 신호를 받는 느낌이다.”(‘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
황 씨는 페트병에 세 그루의 개운죽을 담아서 방안에 놓고 함께 산다. 그는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에서 이렇게 썼다. “자기 뿌리의 터가 불안한 사람은 화초 심기를 꺼리게 마련이다. 마당 없는 사람들이 좁아터진 골목의 자기 집 현관문 바깥에 스티로폼 상자나 금 간 항아리, 혹은 고무그릇을 늘어놓고 가꾸는 화초들은 뿌리를 내리려는 의지처럼 보인다.”
황 씨의 사진 산문집들은 과거가 가뭇없이 사라져가는 시절에 내린 우리 마음의 뿌리처럼 보인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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