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하일지, 해인사 암자서 半스님-半작가 ‘용맹정진’

  • 입력 2005년 8월 11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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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해인사에 머물고 있는 하일지 씨. “불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뭔가 궁구하는 스님들 사이에 있으면 나조차 그렇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해인사=권기태 기자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고 있는 하일지 씨. “불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뭔가 궁구하는 스님들 사이에 있으면 나조차 그렇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해인사=권기태 기자
소설가 하일지(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씨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틈날 때마다 방방곡곡의 사찰을 찾아가 글을 쓴다. 여름에는 특히 그렇다. 경남 합천군 연호사, 전남 화순군 쌍봉사, 충남 서산시 부석사와 일락사 같은 절들을 찾곤 했다.

그는 올여름에는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의 지족암에 머물고 있다. 고려시대에 처음 지어진 절이다.

하 씨는 “2001년 여름 제주 약천사를 찾았다가 만난 성공 스님이 이 암자의 주지로 와 있어 7월 중순에 여기로 왔다”며 “얼마 전 대구에 사는 소설가 장정일 씨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머리 위 나뭇가지에서 뱀이 떨어진 일이 있을 정도로 산이 깊어 좋다”고 말했다.

하 씨는 암자 아래 가파른 비탈에 객승을 위해 세운 숙사 2층의 방 한 칸을 쓰고 있다. 여기서 들창을 가린 감나무 이파리들을 보면서 철학서인 ‘나에 대한 성찰’(가제)을 마지막으로 손질하고, 장편소설 ‘우주피스(Uzpis) 공화국’(가제)을 한참 써 내려가고 있다.

그는 거의 탈고된 ‘나에 대한 성찰’에 대해서 흐뭇해했다. 미리 읽고 호평을 한 사람들이 있는 데다 이곳에 와 보탠 대목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도대체 나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쯤 묻고 싶어 현상학이나 기호학에서 접근해 본 글”이라고 설명했는데 깊은 절에서 붙잡고 늘어질 만한 화두인 것 같다.

그는 “왜 ‘나’라는 존재는 ‘견물(見物)이면 생심(生心)일까’ 하고 자문해 봤다”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 와 계시던 혜광 스님이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하고 말해주더군요. 뭔가 퍼뜩 머릿속으로 지나갔습니다.” 산을 보고 부동산을, 물을 보고 온천 개발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는 “지족암으로 올라오는 갈림길의 다른 쪽으로 향하면 성철 스님이 오래 머무르신 백련암이 나온다”며 “(성철 스님이 남긴 말씀인) ‘산은 산, 물은 물’임을 정작 깨치는 것은 얼마나 힘든 것일까요” 하고 말했다.

그는 현재 쓰고 있는 ‘우주피스 공화국’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하 씨는 미국 친구가 있는 리투아니아를 여러 번 방문했는데 “‘우주피스’는 리투아니아 말로 ‘강 건너’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할’이라는 남자가 자기는 전혀 거주한 기억이 없는 우주피스 공화국에서 촬영된 옛날 자기 사진을 보고 그 공화국을 찾아가는 여로를 다뤘다. 하 씨는 “‘나’라는 존재에게 기억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고 말했다.

해인사 경내는 스님들이 대부분 잠도 자지 않은 채 면벽하는 ‘용맹정진’에 들어가 텅 빈 듯하다. 하 씨는 글을 쓰기 전에 해인사까지 산길을 걷는다. 해인사 판전에 보관 중인 팔만 대장경 가운데 초기 불경들은 문자 없던 시절 부처님을 따르던 아난존자가 순전히 기억만으로 구전한 부처님 말씀이다. 하 씨는 “산길을 떠나 ‘기억이란 뭔가, ‘나’와 기억은 어떤 관계인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판전 근처”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문학이 오래 붙잡아 온 민족주의나 리얼리즘과는 다른 얼굴의 소설을 쓰고 싶다. 그래서 일단 정보가 차단된 깊은 곳으로 찾아왔다”고 말했다.

깊은 밤 그가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글을 쓰는 사이 노란색과 하얀색의 나방들이 날아왔다. 하 씨는 방바닥에서 날개 접고 잠이 든 나방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긴 원래 나방들의 방이지요. 우리는 여길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거랍니다.”

해인사=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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