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마당]‘안기부 X파일’ 보도

  • 입력 2005년 7월 28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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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불법도청 내용을 담은 이른바 ‘X파일’이 올여름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X파일은 그 내용의 파괴력뿐 아니라 ‘파일 공개에 대한 적법성 논란’으로 인해 더욱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헌법 17조)와 언론의 자유(21조)라는 ‘기본권적 가치’가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파일 공개가 불법이라는 측은 “불법으로 획득한 정보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 사건은 공익성이 매우 강해 사생활 보호라는 개인적 이익보다는 알 권리라는 공공의 이익이 우선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중대한 인권침해…불법입수정보는 유포 못해▼

방송과 신문은 처음부터 이 사태에 대한 방향을 잘못 잡아 갈팡질팡하고 있다. 일부 단체와 정치세력은 자기들이 적대시하고 있는 대상들에 대한 공격에 혈안이 되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사태의 본질은 국가 정보기관이 저지른 중대한 불법도청이 사실로 밝혀진 점에 있고, 이런 국가의 불법적 행위에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국가 기능이 왜곡되어 왔다는 점에 있다.

사태의 충격이 크면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기 쉽다. 더욱이 그 장면이 부아를 돋우고 흥분케 할 때 사람들은 쉽게 격정에 휘말려 판단을 그르치기 일쑤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가 응축된 법은 이미 우리에게 이런 사태를 보는 시각과 답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인권수호의 대장정에 새 역사를 만든 ‘미란다 사건’에서도 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1966년 미국 연방최고법원은 강간과 살인 등 파렴치한 범죄를 일삼다 기소된 미란다라는 살인범에게 ‘수사단계에서 묵비권의 고지와 변호사 접견의 기회가 없는 상황에서 수집된 증거는 위법이므로 이를 근거로 한 하급심의 유죄판결은 무효’라고 재판했다.

극악무도한 행위로 수많은 피해자가 죽어간 판에 인간의 얼굴을 한 짐승, 미란다는 법망에서 풀려나 처벌받지 않았다.

백번 죽여도 시원찮을 가해자가 눈앞에 있었지만 놓아준 것이다. 위법한 수사와 불법으로 획득된 증거에 근거한 재판을 인정하면 인권침해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화난 군중은 이 재판에 대해 돌팔매질을 하고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오늘날 모든 자유 헌법의 전당에 묵비권 고지와 변호사 접견권은 불가침의 인권임이 확립됐고 이는 ‘미란다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빛나고 있다. 대한민국 법정에도 이 깃발이 나부끼고 있음은 물론이다.

적법 절차를 위반하고 불법으로 획득한 정보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를 수사의 단서로 이용하거나 재판의 증거로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불법도청으로 생산된 정보를 유출 및 사용한 행위도 당연히 위법이다. 알 권리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그 정보가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것이든 국가나 공익에 관한 것이든, 공공성이 강한 것이든 아니든 마찬가지다.

헌법상의 보도의 자유도 합법적인 영역 내에서만 인정되기 때문에 불법으로 획득된 정보를 보도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번 사건에서도 국가정보기관이 행한 도청은 물론이고 그 도청한 내용을 보도하거나 발설하는 행위는 모두 불법이다.

불법적인 검열, 자백, 고문 등으로 정보를 획득하고 이를 유포하는 것이 불법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불법을 정당화하는 순간 인권은 포말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간 제기돼 왔던 불법도청의 단서가 드러난 만큼 도청행위와 이의 유포행위를 수사하여 한 점 의심 없이 그 전모를 밝히고 관련자들에 대해 법적 책임을 엄중히 묻는 것이 불법도청을 걷어내고 인권을 세우는 지름길이다. X파일 사건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정종섭 서울대 교수·헌법학

▼정당한 알권리…공익은 개인이익보다 우선▼

이번 MBC의 ‘국가안전기획부 X파일’ 보도 사건은 그 사회적 파장만큼 법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실체법적으로는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하여 방송보도를 한 것이 불법행위가 되는지가 문제고, 절차법적으로는 도청이라는 위법한 방법으로 수집한 증거에 의해 관련자를 처벌할 수 있는지도 문제가 된다.

방송사는 테이프의 원음을 방송해서는 안 되고 대화 내용을 인용하거나 실명(實名)을 공개해서도 안 된다는 법원의 방송금지 가처분 결정과,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재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도청된 녹음테이프의 대화 내용과 대화자의 실명을 공개하였다. 이것은 과연 불법인가?

형식적으로 따지자면 다른 사람의 대화가 녹음된 테이프를 외부에 공개했으니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한 것은 물론 개인의 명예를 훼손한 행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국가는 자유로운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하는 언론 없이는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이러한 차원에서 ‘알 권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헌법상 ‘언론 출판의 자유’에 알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통설(通說)이다. 방송은 권력과 사회의 감시자로서 비판 기능을 함으로써 민주적 여론을 형성할 책임이 있다. 따라서 방송사가 재벌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이라는 엄청난 비리 사실을 보도한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국민의 알 권리에 부합한다.

사생활의 비밀 보호라는 개인적 이익과 공공의 이익이 충돌할 때에는 후자에 우선적 가치를 두어야 한다. 대법원도 ‘방송 등 언론매체가 사실을 적시하여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한 경우에도 그것이 공공의 이익에 관한 사항으로서 그 목적이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일 때에는 적시된 사실이 진실이거나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위법성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수없이 내리고 있다.

따라서 방송이 도청 테이프의 대화 내용과 대화자를 공개했다 하더라도 민사상 불법행위가 성립하지 않으며, 형사상으로도 정당행위에 해당하여 위법성이 없으므로 처벌할 수 없다고 본다.

다음으로 안기부가 도청한 녹음테이프를 범법자의 처벌을 위한 유죄의 증거로 쓸 수 있는가? 녹음테이프가 도청이라는 위법한 방법으로 수집된 증거이기 때문에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독나무에 열린 열매는 독과일이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이른바 ‘독수독과(毒樹毒果)’ 이론이다.

하지만 우리 형사소송법에는 위법 수집 증거의 증거능력을 배제하는 규정이 없다. 나아가 이 사건이 발생한 1997년 대법원은 ‘국민의 사생활 영역에 관계된 모든 증거의 제출이 곧바로 금지되는 것으로는 볼 수 없고 공익의 실현을 위해서는 수집된 증거가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더라도 수인(受忍)하여야 할 기본권 제한에 해당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한 바 있다. 이런 관점에서 검찰은 불법 테이프의 내용을 근거로 수사에 착수할 수 있다고 본다.

이번 사건은 아직도 곳곳에 비리가 만연한 우리 사회가 깨끗한 민주사회로 성숙하기 위해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될 것이다.

하창우 변호사·대한변협 공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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