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영언]편지와 격문(檄文)

  • 입력 2005년 7월 21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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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정치’가 유행이다. 인터넷 홈페이지나 e메일을 활용해 현안에 대한 소신을 밝히는 정치인이 부쩍 많아졌다. 요즘 가장 활발하게 편지 정치를 하는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는 올해 들어 벌써 9차례나 편지를 썼다. 최근의 편지가 연정(聯政)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는 편지라기보다 연설이나 담화, 호소문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왕조시대에 성행했던 격문(檄文)도 연상된다. 격문이란 나라에 무슨 사정이 생겼을 때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급하게 써 보냈던, 정치적 선동의 냄새가 나는 글이다. 노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낸 글도 이런 성격이 짙다. 그러다 보니 정치·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해야 할 최고지도자가 오히려 갈등의 중심에 서는 경우가 많다. 연정론만 해도 그렇다. 다수 국민은 관심도 없는데 공연히 나라만 시끄럽게 하지 않았는가.

편지란 본래 사적(私的)인 소통 수단이다. 한 사람이 특정인을 대상으로 쓰는 경우가 자연스럽다. 내용도 차분하고 부드러운 게 정상이다. 또 종이에 써야 제격이다. 자판(字板)을 두들겨 대량 생산되는 인터넷 편지는 무정(無情)하고 삭막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편지를 많이 썼다. 도시로 유학 온 아들은 학자금을 보내 달라며 ‘부모님전 상서’를 썼고, 부모는 공부 열심히 하라는 편지를 자식에게 보냈다. 가슴 저리는 연애편지도 많았다. 군인 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보내는 일은 초중고교생들의 즐거움이었다. 지금은 편지가 많이 줄었다. 대부분의 소식은 휴대전화나 e메일이 대신한다. 이따금 우체국 앞에 붙어 있는 ‘편지를 씁시다’란 현수막이 편지의 쇠락(衰落)을 반영한다.

편지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 주는 정겨운 다리다.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기분이 더없이 좋다.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 내려 간’ 한 장의 편지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고, 삶에 용기와 희망을 준다. 편지에 담긴 글씨체는 인간의 체취(體臭)를 느끼게 한다. 책장을 뒤적이다가 오래전 누군가가 보낸 편지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상상해 보라. 빛바랜 편지를 읽다 보면 추억이 그리움과 감동으로 변한다. 편지는 바른 글씨와 예의바른 행동을 몸에 익히게 한다. 글쓰기 능력이 신장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부가가치다.

편지란 순수할 때 의미가 있다. 거기에 정치와 선동이 개입하면 편지로서는 자격 상실이다. 대통령은 앞으로도 자주 대(對)국민 인터넷 편지를 쓸 모양이다. 그때마다 편지가 주는 인간적 포근함은 없이 정치적 논란만 분분할 것 같아 걱정이다. 대통령은 편지를 줄이고 대신 국민이 편지를 많이 썼으면 좋겠다.

‘한국편지가족’이란 모임(02-959-7525)을 소개하고 싶다. e메일이 아닌 종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정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오래전부터 각종 편지쓰기 대회를 주최하고, 관련 강좌도 열고 있다. 이 모임은 매달 22일을 편지 쓰는 날로 정했다. 둘이서 주고받고 둘이서 마음을 나눈다는 뜻에서 택일(擇日)했다고 한다. 마침 내일이 그날이다. 인터넷에 격문이 넘쳐 나는 세상이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따뜻한 종이 편지가 더욱 그립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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