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금동근]런던의 ‘유비무환’

  • 입력 2005년 7월 11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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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에서 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짐을 싸들고 프랑스 파리발 런던행 유로스타를 탈 때만 해도 비장한 런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나 트래펄가 광장은 적막이 흐를 터이고, 지하철에다 이층버스까지 공격을 당했으니 런던 시민들은 아예 외출을 안 하겠지….

평소보다 까다로워진 검색 때문에 기차가 예정 시간보다 30분 늦게 출발할 때만 해도 이런 예상은 맞을 것 같았다. 그러나 런던의 워털루 역에 내리는 순간 예상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이층버스는 시민들로 가득했고, 지하철역도 평소처럼 붐볐다. 트래펄가 광장은 웃고 떠들며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활기가 넘쳤다. 시내를 오가는 경찰의 표정에서도 별다른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런던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사고 현장인 러셀스퀘어에서 만난 프랭크 도일(64) 씨는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영국인의 국민성을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속으로는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북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테러에 오랫동안 시달려 온 탓에 이 정도의 테러에는 웬만큼 익숙해져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런던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한 한국 교민은 영국인들의 차분한 재난 대응 방식을 꼽았다. 영국인들은 이런 큰일이 터지면 우선 사태 수습에 전력한다는 것. 왜 대비를 못했느냐,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느냐 같은 시비는 사태가 모두 수습된 뒤에 천천히 가려도 된다는 것이 영국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라는 설명이다.

오히려 정부의 대(對)테러 대책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과 스페인의 테러가 있은 뒤 정부가 대비를 해 온 덕택에 이 정도의 피해에 그쳤다는 평가였다. 한 런던 시민은 “언젠가 테러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해 왔다”면서 “카나리 워프가 공격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반응했다. 카나리 워프는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어 런던에서 테러 대상 1순위로 꼽히는 지역이다.

그의 말처럼 영국 사회는 ‘이머전시 플랜(Emergency Plan·위기 상황 비상 대책)’이 제대로 구축돼 있다는 사실을 이번 테러를 통해 분명히 보여 줬다.

실제로 이번 테러가 발생하자마자 경찰과 구조대는 사건 현장에 신속히 투입됐다. 비상 호출을 받은 의사들이 몇 분도 안 돼 현장에 도착해 부상자를 돌본 덕분에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과거의 테러 경험과 비상 대책에 익숙한 터라 시민들의 대응도 침착했다. 테러 공격을 받은 지하철 내에서도 시민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고, 다시 지하철 문이 열렸을 땐 질서 정연하게 출구로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런던의 이런 침착한 대응과 테러 이후 곧바로 평온을 되찾은 모습을 놓고 외국 언론들은 “런던이 테러를 당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승리한 쪽은 테러범이 아니라 오히려 영국”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영국의 정보기관도 막지 못한 이번 런던 테러를 통해 ‘테러 안전지대’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 또다시 확인됐다. 어느 나라도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다. 이라크에 파병을 했건 안 했건, 테러단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그 희생물이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심지어 ‘테러의 일상화’를 맞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영국은 ‘만약(If)’이 아니라 ‘언제(When)’ 테러가 터질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만반의 준비를 해 온 덕분에 신속히 일상을 회복했다. 우리는 얼마나 준비가 돼 있는지 궁금하다.<런던에서>

금동근 파리 특파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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