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68>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5월 2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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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형양성이 패왕 항우의 대군에 에워싸인 지 달포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초군의 양동(陽動)에 지치고 갈무리한 곡식이 바닥나 점차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 성안 군민들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한왕이 장량과 진평을 불러놓고 말했다.

“초군의 공세가 갈수록 날카로워지는 데다 양도(糧道)마저 끊어져 쌀 한 톨 성안으로 들여올 수 없으니 실로 걱정이오. 식량은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소?”

“끼니를 한 끼 줄이고 군마(軍馬)를 잡아 고기를 써도 두 달을 넘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진평이 별로 헤아려 보는 법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 진평은 호군중위(護軍中尉)로 일했으나, 이재(理財)에도 밝아 군중(軍中)의 금전과 곡식의 출납까지 함께 맡아보고 있었다. 한왕이 장량과 나란히 진평을 부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두 달로는 대장군 한신이 제나라를 평정하고 조(趙) 연(燕) 조(齊)의 전력을 긁어모아 돌아오기를 기다리기에는 모자라오. 팽월이 양(梁)땅을 휘저어 초군의 양도를 끊어놓는다 해도 초군이 굶주림에 몰려 돌아가기를 기다리기에는 두 달은 너무 짧으며, 또한 경포가 구강(九江) 땅을 되찾고 다시 서초로 밀고 들어가 항왕을 그리로 불러들이기를 바랄 수 있을 만큼 길지도 못하오. 우리 힘으로 양도를 뚫지 못한다면 달리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을 벌 궁리를 해봐야겠소. 무엇이든 항왕에게 내주고 싸움을 미뤄 얼마간이라도 그 날카로운 칼끝을 피해볼 길은 없겠소?”

“대왕께서 항왕에게 무엇을 내주시고 싸움을 미루자 하시겠습니까?”

주고받는 이야기라서 그런지 이번에도 진평이 나서서 한왕의 말을 받았다. 한왕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형양 동쪽의 땅을 모두 항왕에게 내어주기로 하고 잠시 휴전을 하면 어떻겠소?”

“형양 동쪽의 땅은 이미 항왕의 세력 아래 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형양성만 우려 뽑으면 천하가 모두 항왕의 땅이 될 참인데, 무엇 때문에 이미 차지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형양 동쪽의 땅을 받고 싸움을 그치겠습니까?”

“그렇지 않소. 진나라를 쳐 없애고 천하를 쪼갤 때 항왕은 우이(牛耳)를 쥐고 있으면서도 서초(西楚)만을 갈라 그 뜻이 크지 않음을 드러내었소. 또 형양 동쪽에 있는 조나라와 연나라는 지금 대장군 한신과 장이가 차지하고 있고, 양과 구강은 팽월과 경포 때문에 어수선하오. 따라서 한신과 장이에게 조나라와 연나라를 내놓게 하고, 또 팽월과 경포마저 관중으로 불러들여 서초의 앞뒤를 평온하게 만들어준다는데 어찌 항왕이 귀가 솔깃하지 않겠소?”

그래도 진평은 그런 한왕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차마 막 대놓고 따지지는 못해도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한왕의 말을 듣다가 장량을 건너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장량이 전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진평 대신 한왕의 말을 받았다.

“지금 항왕으로부터 휴전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이치가 아니라 힘입니다. 먼저 우리가 휴전을 요구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준 뒤에 사자를 보내 싸움을 미루자고 달래야만 항왕도 대왕의 뜻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먼저 힘을 보여준다? 그게 무슨 뜻이요? 무얼 어떻게 보여준단 말이오?”

한왕이 문득 반가워하는 낯빛으로 장량을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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