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鐵娘子 배짱, 日콧대 꺾다” 中 우이열풍

  • 입력 2005년 5월 26일 03시 21분


코멘트
《‘중국의 대처’로 불리는 우이(吳儀·66) 국무원 부총리의 두둑한 배짱이 또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23일 일본 도쿄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의 회담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일방적으로 취소한 뒤 귀국한 것이 발단이 됐다. 그의 행동에 대해 중국 내에서는 환영 일색의 분위기다. 16일 고이즈미 총리가 일본 국회에서 “전몰자 추도 문제는 다른 나라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며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입장을 고수하는 발언을 정면으로 맞받아쳤기 때문이다.》

우 부총리는 본국 지도부에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담 거부를 먼저 요청한 뒤 22일 밤 지도부로부터 동의한다는 회신이 오자 곧바로 귀국 결정을 했다. “국내에 급한 일이 있다”는 말만 남겼을 뿐이다. 한번 한다면 하는 그의 배짱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관영 신화통신 등 중국 인터넷사이트는 “중국의 여장부로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국가와 민족의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는 등의 누리꾼(네티즌)들의 찬사로 가득했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의 한 관리는 “우리는 외교채널을 통해 (중국 측에) 설명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우 부총리는 중국 내에서 ‘철의 여인(鐵娘子)’으로 유명하다. 1990년대 대외무역경제합작부장 시절 ‘미국의 여걸’로 불리던 칼라 힐스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지적재산권 협상을 벌이면서 얻은 별명이다.

당시 힐스 대표가 중국 내 불법 복제 문제를 거론하면서 중국을 ‘좀도둑’에 비유하자 그는 “그러면 미국은 과거 중국의 유물을 강탈해 간 ‘날강도’가 아니냐”며 되받아쳤다.

1938년 후베이(湖北) 성 우한(武漢)에서 태어난 그는 1962년 베이징석유학원(대학) 석유정제과를 졸업했다. 그 후 26년간 석유화학회사에서 근무하다 베이징 부시장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98년 주룽지(朱鎔基) 당시 총리가 강력히 그를 천거해 그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국무위원으로 등용됐다. 그 이후 우 부총리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2010 상하이 박람회 유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아직 미혼인 우 부총리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총리이며 중국 공산당의 핵심기구로 24명으로 구성된 정치국의 유일한 여성 국원이다.

반면 그의 능력에 다소 거품이 끼었다는 ‘버블론’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4월 미 비즈니스위크는 “중국이 WTO 가입시 우 부총리가 지나치게 많이 양보했으며 특히 농업 분야 협상은 크게 서툴렀는데 이는 그가 농업을 잘 모르는 ‘지식인’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보도했다.

▼우이 부총리의 약력▼

1938년 11월: 후베이(湖北) 성 우한(武漢) 출생

1956∼62년: 시베이(西北)공학원 국방학과, 베이징(北京)석유학원 석유정제과 졸업

1962년: 중국 공산당 입당

1962∼65년: 간쑤(甘肅) 성 란저우(蘭州) 정유공장 기술자

1965∼67년: 석유공업부 생산기술처 기술자

1967∼83년: 베이징 둥팡훙(東方紅) 정유공장 기술자, 과장, 부공장장

1983∼88년: 베이징 옌산(燕山) 석유화학공업회사 부사장

1988∼91년: 베이징 시 부시장

1991∼93년: 대외무역경제합작부

부부장

1993∼98년: 대외무역경제합작부 부장

1997년 9월: 정치국 후보위원(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

1998∼2002년: 국무위원

2002년 11월: 정치국원(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

2003년 3월: 국무원 부총리(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베이징=황유성 특파원 yshwang@donga.com

이호갑 기자 gdt@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