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부총리는 본국 지도부에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담 거부를 먼저 요청한 뒤 22일 밤 지도부로부터 동의한다는 회신이 오자 곧바로 귀국 결정을 했다. “국내에 급한 일이 있다”는 말만 남겼을 뿐이다. 한번 한다면 하는 그의 배짱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관영 신화통신 등 중국 인터넷사이트는 “중국의 여장부로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국가와 민족의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는 등의 누리꾼(네티즌)들의 찬사로 가득했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의 한 관리는 “우리는 외교채널을 통해 (중국 측에) 설명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우 부총리는 중국 내에서 ‘철의 여인(鐵娘子)’으로 유명하다. 1990년대 대외무역경제합작부장 시절 ‘미국의 여걸’로 불리던 칼라 힐스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지적재산권 협상을 벌이면서 얻은 별명이다.
당시 힐스 대표가 중국 내 불법 복제 문제를 거론하면서 중국을 ‘좀도둑’에 비유하자 그는 “그러면 미국은 과거 중국의 유물을 강탈해 간 ‘날강도’가 아니냐”며 되받아쳤다.
1938년 후베이(湖北) 성 우한(武漢)에서 태어난 그는 1962년 베이징석유학원(대학) 석유정제과를 졸업했다. 그 후 26년간 석유화학회사에서 근무하다 베이징 부시장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98년 주룽지(朱鎔基) 당시 총리가 강력히 그를 천거해 그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국무위원으로 등용됐다. 그 이후 우 부총리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2010 상하이 박람회 유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아직 미혼인 우 부총리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총리이며 중국 공산당의 핵심기구로 24명으로 구성된 정치국의 유일한 여성 국원이다.
반면 그의 능력에 다소 거품이 끼었다는 ‘버블론’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4월 미 비즈니스위크는 “중국이 WTO 가입시 우 부총리가 지나치게 많이 양보했으며 특히 농업 분야 협상은 크게 서툴렀는데 이는 그가 농업을 잘 모르는 ‘지식인’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보도했다.
▼우이 부총리의 약력▼
1938년 11월: 후베이(湖北) 성 우한(武漢) 출생
1956∼62년: 시베이(西北)공학원 국방학과, 베이징(北京)석유학원 석유정제과 졸업
1962년: 중국 공산당 입당
1962∼65년: 간쑤(甘肅) 성 란저우(蘭州) 정유공장 기술자
1965∼67년: 석유공업부 생산기술처 기술자
1967∼83년: 베이징 둥팡훙(東方紅) 정유공장 기술자, 과장, 부공장장
1983∼88년: 베이징 옌산(燕山) 석유화학공업회사 부사장
1988∼91년: 베이징 시 부시장
1991∼93년: 대외무역경제합작부
부부장
1993∼98년: 대외무역경제합작부 부장
1997년 9월: 정치국 후보위원(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
1998∼2002년: 국무위원
2002년 11월: 정치국원(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
2003년 3월: 국무원 부총리(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베이징=황유성 특파원 yshwang@donga.com
이호갑 기자 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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