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학포럼 참가 獨 원로시인 비어만의 인생역정

  • 입력 2005년 5월 26일 0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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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시인 볼프 비어만이 25일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서 독일 통일의 교훈을 들려주고 있다. 시를 노래로 부르는 그는 '내가 들고 있는 기타는 1936년생, 나와 동갑'이라고 말했다.  권주훈 기자
독일 시인 볼프 비어만이 25일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서 독일 통일의 교훈을 들려주고 있다. 시를 노래로 부르는 그는 '내가 들고 있는 기타는 1936년생, 나와 동갑'이라고 말했다. 권주훈 기자
독일 원로시인 볼프 비어만(70)은 2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김민기 씨의 노래 ‘아침 이슬’을 독일어로 옮긴 노래를 두 번 불렀다.

한 번은 이날 오전 서울국제문학포럼 발제 때, 한 번은 오후 기자회견장에서였다. 그는 2003년 독일에서 만난 김 씨로부터 배운 이 노래가 독일 통일을 간절히 바랐던 자신의 역정을 대변해 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이제 분단국가인 한국이 “긴 밤 지새우고 저 거친 광야(통일)의 길로 꿋꿋하게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1998년 독일 국가 공헌상을 수상한 그는 이번 포럼에 참가한 여러 나라 문인들 가운데 가장 험난한 삶을 살았던 사람일 듯 싶다. 공산주의자로서 나치정권에 저항했던 아버지는 오랜 수감을 마치고 나오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숨졌다.

독일 패전 후 그의 어머니는 “나는 생활 터전이 있는 서독의 함부르크에서 살겠지만 너는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의 길을 따라 동독으로 가라”고 권유했다.

“열일곱 살이던 1953년 아직 장벽이 세워지지 않은 동베를린으로 홀로 건너가 대학을 다니며 극단 활동과 시 쓰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동독 공산 체제의 혹독한 인민 감시를 비판하는 예술활동을 하자 억압이 가해지더군요. 통일된 뒤에 보니 동독 국가안전부가 (나를) 감시한 보고서, 도청 기록이 A4 용지 수천 장에 달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시에 가락을 붙여 부른 노래들을 담은 테이프가 급속도로 전파되자 동독 정부는 1965년 그에게 예술 활동 금지 조치를 내렸고, 1976년에는 서독으로 추방했다. 그는 “서독으로 끌려나왔을 때 처음 만난 내 저작권 대리인도 나중에 알고 보니 동독 사회안전부가 밀파한 정보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극단 활동을 하며 청춘의 즐거움을 맛 봤던 동독 시절을 그리워했지만 그 체제는 결코 사람들이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염원하던 통일이 이뤄졌지만 통일 과정은 그를 다시 분노케 했다. “저를 감시하던 사회안전부 간부들은 연금으로 안락하게 살고 있습니다. 모두 서독에서 조성한 연금 기금에서 나온 것이지요. 이 연금이 통일 15년 만에 모두 바닥났습니다. 마르쿠스 볼프라는 전 사회안전부장은 지금 독일 토크쇼를 누비고 다닙니다. 구동독 관료들은 통일 전 외국은행에 맡긴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지만 독일 정부는 이 ‘장물(贓物)’들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이들(당 관료들)은 자신들을 도둑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계급의 적에 대항하는 전사로 생각합니다.”

그는 북한을 ‘절대 기아국’ ‘최악의 대중적인 고문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라고 부르면서 “한국의 통일 과정은 독일의 경우보다 더 험할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날 회견에서 통일에 대해 환상적인 기대를 갖기보다 굳은 의지를 갖기를 충고하고 싶은 듯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반드시 가야만 하는 하나뿐인 길이 아니겠습니까. 프랑스 속담에는 ‘사전에 경고 받은 이는 두 배 강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경이 있더라도 여러분의 힘과 지혜로 통일의 길을 꿋꿋하게 가기를 바랍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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