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漢字 백가지 이야기’…고대인 祭儀 담은 영상기록

  • 입력 2005년 5월 13일 17시 10분


코멘트
◇漢字백가지 이야기/시라카와 시즈카 지음·심경호 옮김/391쪽·2만3000원·황소자리

아프리카 바르바족은 3가지 이름을 지닌다. 첫째는 평생 비밀에 부쳐지는 ‘존재의 이름’, 둘째는 성인식 등 통과의례 때 붙여지는 이름, 셋째는 임의로 선택된 호명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명(名), 자(字), 호(號)는 이 셋에 해당한다.

도대체 이름이 왜 이렇게 많은가. 거기에 한자의 비밀이 숨어 있다. 名은 흔히 저녁 석(夕)과 입 구(口)의 합성어로 ‘저녁에는 입으로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풀이돼 왔다. 그러나 일본 최고 한학자로 꼽히는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95) 전 리쓰메이칸(立命館)대 교수는 이를 후대의 추측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을 분석했을 때 名의 윗부분은 제사에 쓰이는 고기를, 아랫부분은 조상의 사당에 고하는 축문을 담는 제기를 뜻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아이가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조상 신령의 승인을 받는 통과의례를 거쳤다. 명은 바로 그런 절차를 상징화한 것이다. 이런 절차를 거친 명은 그 인격의 실체와 분리될 수 없는 ‘영혼의 이름’이기 때문에 함부로 불려져선 안 되고 죽은 뒤에나 불려져야 할 이름이다.

‘집(家) 속에 아이(子)가 있다’로 풀이되는 字는 선조의 사당에 아기를 처음 보이는 통과의례를 형상화한 글자다. 따라서 字는 정식 명을 갖기 전 ‘어렸을 적 이름’을 말한다. 반면 호(號)는 명이 확정된 뒤 그를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한 대체 이름이다.

한자는 이처럼 신화적 상징을 형상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한자는 시초부터 대상을 그대로 모사한 것이 아니라 고도의 상징행위인 제의(祭儀)에서 비롯된 또 다른 상징물이다.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이 왕이 시행할 정치의 길흉을 미리 신에게 묻는 점복(占卜)의 결과를 기록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라.

이에 따르면 ‘말씀 언(言)’은 신에 대한 맹세가 담긴 축문을 어길 경우 벌을 받겠다는 적극성이 담겼고, ‘말씀 어(語)’는 그 축문이 저주로 방해받는 것을 막겠다는 방어성이 담겼다. 또 좌(左)와 우(右)는 왼손에는 주술도구(工), 오른손에는 축문이 담긴 제기(口)를 들고 제사를 지낼 장소를 찾는 행위에서 유래했다. 이는 ‘찾을 심(尋)’의 고어가 左와 右가 겹쳐진 형태로 신의 소재를 찾으려는 행위에서 기원했다는 분석에서도 확인된다.

한자의 이런 본래의 표상에 대한 기억은 600여 년의 기간을 계승돼 오다가 춘추전국시대를 맞으면서 지역적 분화로 붕괴됐다. 과거 신성한 제사에만 사용되던 한자가 세금을 걷기 위한 도량형 기구 등 실용 목적에 쓰이면서 필기체 양식이 등장한 점도 본래의 자형을 무너뜨리는 데 한몫을 했다. 이후 한자는 간략화와 곡선의 직선화를 거치면서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어형을 새롭게 정립하게 됐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한자가 본래 지닌 영상성의 회복을 강조한다. 소쉬르 이래 서구의 언어학은 언어를 뜻과 기호로 분리해 바라본다. 이런 이분법은 알파벳과 한글처럼 음성을 베낀 표음문자에는 적용 가능하지만 하나의 영상으로 각인되는 한자에는 적용될 수 없다.

한자는 고대인의 제의를 영상으로 담아 낸 영상기록물이다. 따라서 그 영상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면 암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 이는 한자의 자형이 1000분의 1초 만에 파악될 수 있고, 실어증 환자도 한자의 의미를 환기할 수 있다는 실험결과가 뒷받침한다. 어쩌면 만화와 한자를 결합한 ‘마법천자문’의 대성공도 이런 한자의 영상 언어적 속성 때문이 아닐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