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체사레 보르자…’를 다시 읽다

  • 입력 2005년 4월 20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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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가 쓴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은 1492년의 콘클라베(교황 선출회의) 얘기에서부터 시작한다. 8월 어느 날 친구와 함께 기마술을 연마하던 17세의 보르자는 헐레벌떡 달려온 하인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아든다.

추기경인 아버지가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됐다는 편지였다. 교황 알렉산드로 6세다. 마키아벨리가 그 유명한 ‘군주론(Il Principe)’의 이상형으로 흠모하기도 했고 나중엔 실망하기도 했던 바로 그 보르자가 이탈리아 역사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콘클라베는 역사를 바꾼다.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선출한 콘클라베도 그랬지만 1492년의 콘클라베도 이탈리아의 역사를 바꿨다. 주인공이 교황이 아니라 아들이긴 하지만….

아버지가 입혀 준 ‘주황색 법의’(추기경 옷)까지 벗어던지고 오직 냉혹한 욕망에 따라 자신의 왕국을 건설해 나가던 보르자. 그는 반란군을 물리친 어느 날 오전 2시 피렌체공화국의 사신(使臣)으로 와 있던 마키아벨리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나의, 그리고 당신들의 적이기도 한 그들을 멸망시킬 수 있어서 기쁘오. 이탈리아 불화의 원천을 멸망시킨 거지.”

마키아벨리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이탈리아요?”

“그렇지. 이탈리아요.”

시오노는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이탈리아. 이 말은 몇 세기 동안이나 시인(詩人)의 사전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가 사귄 그 어떤 인물도 이 말을 입 밖에 낸 사람은 없었다. 당시의 이탈리아에는 피렌체인, 베네치아인, 밀라노인, 나폴리인은 있어도 이탈리아인은 없었던 것이다.’

보르자는 ‘이탈리아왕국’ 건설을 위해 당시 유럽 최대의 군사 강국이던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혈맹’을 맺는다. 루이 12세는 23세의 보르자를 “나의 사랑하는 종제(從弟)”라고 불렀고, 보르자는 언제나 “저는 프랑스의 체사레 보르자입니다”라고 했다. 그런 ‘혈맹’으로 보르자는 프랑스 군대의 힘을 빌릴 수 있었지만 반대로 루이 12세의 용병대장도 돼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혈맹’은 ‘여우의 결합’이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한 바로 그 여우였다.

보르자는 전쟁을 치르면 치를수록 ‘자주국방’에 목말라했다. 가구당 병사 한 사람씩을 내놓으라는 포고를 내렸다. 전쟁과 국방을 용병에 의존하던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구상이었지만 후일 마키아벨리가 제창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근대 징병제도는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을 다시 읽으면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한미관계를 떠올린다면 ‘정말 생뚱맞은 생각’인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의 상념은 자꾸만 거기로 치닫는다. 같은 반도국가여서 뭔가 알 수 없는 이끌림이 있는 걸까….

마키아벨리는 군주란 모름지기 여우의 머리와 사자의 용맹을 함께 가져야 한다고 절규했다. 우리는 혹시 ‘여우의 머리’가 필요한 때 ‘사자의 용맹’을 들이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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