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29>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4월 11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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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 무렵 한왕 유방은 형양 남쪽에 본진을 두고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나 높은 가지에 올라앉은 독수리가 잠시 나래를 접고는 있어도 그 흉흉한 눈길만은 쉬지 않고 사방을 노리듯, 한왕도 눈과 귀를 곳곳에 풀어 천하의 변화를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 한왕은 패왕과의 천하를 건 싸움에서 새롭게 전개되는 국면을 차분히 음미하고 자신에게 맞게 익혀가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새로운 국면은 먼저 그 무렵 벌어지고 있는 전투의 양상에서 감지되었다. 이제는 하나하나의 전투가 곧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작은 물줄기로서 전쟁이란 커다란 물결을 구성할 뿐이었다. 따라서 그 사이에도 초나라와 한나라 사이에는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지만 일도양단의 승부라기보다는 양군 전력(戰力)의 강약과 우열(優劣)이 지루하게 교차하는 형태로 변해갔다.

처음 패왕이 대군을 이끌고 팽성에서 북상한다고 할 때만 해도 한왕은 드디어 한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결전이 임박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의외로 패왕의 도착이 늦어지는 것을 보고 싸움의 양상이 달라졌음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그 사이 둘 모두 이름과 몸집이 아울러 부풀어 올라, 이제는 한 싸움으로 승패를 결정짓는 장수가 아니라 나라를 들어 천하를 다투는 군왕(君王)이 되어 있었다.

한왕이 형양을 한신에게 맡겨 두고 관중으로 돌아가 내치(內治)를 정비한 것도 그렇게 질적으로 변화된 싸움의 양상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목에 걸린 가시 같던 폐구(廢丘)를 우려 빼고 옹왕(雍王) 장함을 잡아 죽인 것이나, 아들 영(盈)을 태자를 세우고 소하를 승상으로 삼아 자신이 없어도 관중의 한나라는 이어갈 수 있게 해둔 일이 그랬다. 한 전투로 모든 것이 결정 나고 마는 싸움이라면 그 모두가 쓸데없는 허영이요 낭비였다.

하지만 한왕이 한층 더 절실하게 변화된 싸움의 양상을 느낀 것은 한신의 위나라 정벌이 시작된 뒤였다. 그때는 이미 초나라 본진이 대량(大梁)에 이른 뒤라 패왕이 마음만 먹으면 며칠 안으로 형양을 에워쌀 수도 있었다. 팽월은 풍비박산이 나 하수(河水) 북쪽으로 달아나고 광무산을 지키는 번쾌도 오창의 용도(甬道)를 지키는 주발도 패왕이 보낸 군사들에게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 불같은 때에 한신에게 3만을 떼어주며 위나라를 정벌하게 한 것은 위태하기 짝이 없는 도박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떠나면서 오히려 초군(楚軍)의 압박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먼저 기장(騎將) 관영이 이끈 한군(漢軍) 별동대가 초나라 군사들의 양도(糧道)를 끊고 그 치중(輜重)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동쪽의 압박이 해소되었다. 군량을 지키고 보급선을 확보하기 위해 적지 않은 초군이 그리로 돌려진 것이었다.

그 뒤 관영의 활약은 말 그대로 눈부신 데가 있었다. 양무(陽武)에서 출발해 양읍(襄邑)에 이른 관영은 이어 노현(魯縣)으로 달려가 초나라 장수 항관(項冠)을 쳐부수었다. 그 싸움에서 관영의 군사들은 초나라 우사마(右司馬)와 기장 하나를 목 베었다. 이어 관영은 초나라 장수인 자공(자公) 왕무(王武)를 치고 연(燕)나라 서쪽에 머물렀는데, 그때 그가 거느린 장졸들은 누번(樓煩)의 장군 다섯 명과 연윤(連尹) 하나를 죽였다. 그리고 백마현(白馬縣) 일대를 휩쓸며 초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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