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용목사 “지도자들 신탁안 라디오만 듣고 흥분”

  • 입력 2004년 1월 18일 1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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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    변영욱기자  cut@donga.com
강원용 목사 변영욱기자 cut@donga.com
《한국 현대사를 둘러싼 모든 논란은 궁극적으로 건국의 여명기인 광복 이후 3년간의 혼돈과 맞닿아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와 직결돼 아직도 치열한 이념논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 내년이면 광복도 60주년. 그러나 그 시절 격동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 줄 원로들이 이젠 몇 분 남아 있지 않다. 월간 ‘신동아’가 작년 12월부터 강원용(姜元龍·87)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연재를 시작한 것도 원로들의 소중한 증언을 채록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17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강 목사를 만났다.》

―지난해 한길사에서 펴낸 ‘역사의 언덕에서’라는 저서 서문에 “나는 역사 속에서 양극을 넘어선 제3지대에 설 자리를 마련하려고 애썼다.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Between and Beyond)’ 살고자 했다”고 쓰신 것을 읽었습니다. 광복을 북한에서 맞으셨는데….

“치안유지위원회에서 일제 때 감옥에 갔다 온 애국자라며 내게 부위원장 겸 선전부장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데모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나는 곧 인민재판에 회부됐습니다. 남아 있으면 죽겠다 싶어 회령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1945년 9월 20일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좌우 대립이 극렬했습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곳곳에 나부끼는 붉은 깃발들이었습니다. 화신백화점에도 인민공화국기가 내걸렸습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알려졌을 때는 어땠습니까.

“배재중학교 강당에서 월남 동포를 위한 연말 자선음악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의 지지자였던 이규갑(李奎甲) 목사가 뛰어들어 와 지팡이를 내리치면서 호통을 쳤어요. ‘모스크바에서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겠다는 결정이 났다는 방송이 나왔는데 지금 음악회가 뭐야. 정신 빠진 놈들’이라고. 그래서 즉시 음악회를 반탁 강연회로 바꿨습니다.”

―경교장 모임에도 참석하셨는데….

“행사 직후 경교장으로 백범을 찾아가 정당·사회단체를 불러 궐기할 것을 촉구하자 백범은 ‘그래그래, 나도 라디오에서 들었어’라고 했어요. 12월 29일 밤 경교장 모임엔 좌우익 단체가 전부 참석했지요.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좌우 가릴 것 없이 울분으로 감정이 북받쳐 있었으니까요. 백범은 구두를 벗어 흔들면서 ‘이것이 양화 아니냐. 모두 이를 벗고 짚신을 신고 다니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김규식(金奎植) 박사도 굉장한 (신탁통치) 반대 말씀을 했습니다.”

―논란은 없었습니까.

“모임 참석자 중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실질적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동아일보 사장이자 한민당 수석총무였던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선생의 얘기가 인상적이었어요. 고하는 ‘여러분들이 격한 것을 이해하지만, 3상회의 결정문을 읽어본 사람이 누가 있느냐. 나도 라디오로 들었는데, 민족의 지도자들이 방송에서 나온 것만 듣고 이렇게 막 들고 일어나는 것은 신중치 못하다’고 말했지요. 그는 또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어 한국의 정당·사회단체들과 의논해 5년 이내에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내용이 진짜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좌익 사람들이 ‘역적이다. 너희가 미국과 짜고 하는 게 아니냐’며 욕설을 퍼부어댔습니다. 고하는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튿날 새벽 암살당했습니다. 나도 당시엔 고하를 오해했는데 세월이 지나서 보니까 그분이 정세 판단을 가장 정확하게 한 것임을 깨닫게 됐어요. 사실 정확한 내용도 모른 채 방송만 듣고 전 민족의 지도자들이 나선 것은 경박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국민대회가 열리지 않았습니까.

“12월 31일 서울운동장에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지요. 서울시내 상점은 거의 문을 닫고, 동대문 뒷산이 하얗게 덮일 정도로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렸어요. 좌우 갈등이 격화되는 시기였지만 반탁운동 초기엔 이데올로기 대립이 없었습니다.”

―당시 반탁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반탁운동은 누가 계획하고 주도해서 일어난 게 절대 아닙니다. 좌도 없고 우도 없이 완전히 자연발생적이었습니다. 거기에 미국이나 소련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습니다. 12월 31일 대회까지는 온 국민이 하나였는데 이듬해 들어 갈라지기 시작했지요.”

―어떻게 해서 분열과 대결의 길을 걷게 됐습니까.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좌익세력이 신탁통치에 결사반대하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반탁운동이 분열됐습니다. 그러자 ‘아 소련이 배후에서 (신탁통치를 추진)한 것이구나’ 하는 인식이 퍼지게 된 것이지요.”

―목사님께선 1948년 평양 남북협상 참가를 반대하셨지요.

“‘가봤자 김일성에게 농락만 당한다’며 백범을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백범은 ‘나는 혁명가야. 혁명가는 항상 낙관을 해야 돼’라며 평양행을 강행했습니다. 김규식 박사는 달랐습니다. 김일성을 만나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김 박사는 어쩔 수 없이 떠나시면서 내게 ‘무거운 걸음이니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중도노선을 견지한 김규식 박사와 특히 가까우셨는데….

“김 박사는 이승만 박사보다도 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김 박사는 내게 ‘한국이 공산국가가 되면 피바다가 된다’며 ‘자네는 공산당이 뭔지 몰라’라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미 군정청에서 적십자사 총재를 맡겼는데도 김 박사는 이사 가운데 박헌영(朴憲永)이 들어 있자 ‘그 사람과는 일할 수 없다’며 거절할 정도였습니다.”

―내년이 광복 60주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현대사엔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대목이 많습니다. 현대사를 전공하는 학자들도 대부분 남아 있는 문서에 의존해 연구를 하다 보니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밝힐 것을 밝히지 않으면 미래의 역사를 만드는 이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정리=허 엽기자 heo@donga.com

cclim@donga.com

▼강원용 목사 약력▼

△1917년 함남 이원 출생

△일본 메이지학원 영문학부·한신대·캐나다 매니토바대·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대 졸업

△경동교회 목사, 한국크리스천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아시아종교평화회의(ACRP)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공동의장

△현재 세계종교평화회의(WCRP) 공동명예의장,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회 이사장, 평화포럼 이사장

허엽기자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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