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분위기 메이커' 이야기 꾼들의 세계

  • 입력 2003년 12월 25일 17시 22분


코멘트
《소설가 황석영은 문단에서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통한다. 과장이나 허풍을 뜻하는 속어인 ‘구라’를 붙여 ‘황구라’라고도 불린다. 그는 술자리에 참석한 사람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이야기 세례를 베푼다. 단 한 사람과 만나도 정열적으로 이야기를 퍼붓는 데 감동했다고 그와 독대를 했던 한 일간지 문학 담당 기자는 털어놓았다.

환갑이 지난 지금은 잘 하지 않지만 그의 가장 유명한 레퍼토리는 ‘뱀장수’였다. 70년대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서울 종로구 관철동 일대 주점에서 그가 혁대를 뽑아들고 장터를 떠도는 뱀장수 흉내를 낼 때면 좌중은 시쳇말로 뒤집어졌다.

그러나 황석영씨가 뱀장수 이야기를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혼자서 수차례 연습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2월의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각종 모임이 절정에 이르고 있다. 어떤 종류의 모임이든 좌중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이야기꾼들이 있기 마련이다. 똑같은 말과 행동이라도 그가 하면 다르고 왠지 재미있다.

연이은 모임에서 당신은 어디, 어떻게 앉아있는가. 주어지는 술잔만 들이키면서 그 자리의 이야기꾼을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는가. 이야기꾼이 되는 열쇠는 황석영씨의 사례에 다 들어있다. 그 열쇠를 일찌감치 손에 쥔 4명의 이야기꾼이 노하우를 이야기했다.

현대자동차 마케팅전략팀 김방신 부장(44), 대한항공 판매팀 황재문 과장(34), 쌍용정보통신㈜ 이정구 대리(30), LG전자 LSR연구소 조재연 연구원(30)은 각사가 자랑하는 ‘꾼’들이다.

옛날 이야기꾼은 주로 장터에서 사람들을 상대로 설화, 민담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들은 좀 다르다. 모임의 처음부터 끝까지 쥐락펴락하는 사회자형, 화제의 맥을 짚어가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해설가형, 마음 맞는 동료와 주거니받거니 이야기를 끌어가는 만담꾼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분위기메이커라는 점이다.

물론 이들이 전해주는 팁만으로 모두 뛰어난 이야기꾼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말자. 들어주는 당신이 없다면 이야기꾼이 설 곳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 공부냐 순발력이냐

김방신 부장은 동서고금의 해박한 지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올해 세운 목표 중 하나가 경제 경영 중국고전과 관련한 책 50권 읽기. 매일 신문을 줄쳐 가며 읽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분야로 나눠 스크랩을 한다.

“(이야기꾼의) 첫째 덕목은 메인 스트림(주류)이 되는 정보와 화제에 정통하는 것입니다.”

이정구 대리도 김 부장과 같은 ‘공부형’ 이야기꾼이다. 올해 TV의 사극 열풍이 불자 이 대리는 먼저 빠짐없이 드라마를 봤다. 재방송으로 복습까지 했다. 여기에 인터넷과 책을 통해서 각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꿰뚫었다.

“대장금에 나오는 음식이 어떻고, 이영애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다 알거든요. 시대 배경이 되는 중종반정(反正)과 폐비 윤씨, 연산군의 등장까지 곁들이면 더 재미있죠.”

이 대리의 말에 황재문 과장은 “오호, 대단한 스터디(study)파군요”라고 맞받아쳤다.

사내 행사의 사회를 전담하다시피 하는 황 과장이 생각하는 이야기꾼의 최고 덕목은 순발력. 그때그때 상황에 딱 떨어지는 말을 할 줄 아는 능력이다. 그는 이야기꾼은 판소리할 때 적재적소에 추임새를 넣는 고수(鼓手)와도 같다고 말한다. “1고수 3명창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고수가 판을 이끈다는 것이다.

조재연 연구원도 비슷한 생각이다. “상대방이 기대하지 못한 말을 던지는 것도 중요하죠.” 예를 들면 이렇다. 비행기를 타면 승무원이 와서 “음료수 드시겠습니까”하고 묻는다. 보통 예상되는 대답은 “네”다. 그러나 조 연구원의 대답은 “감사할 따름이지요”이다. 웃음이 나온다.

그렇다고 김 부장이나 이 대리가 순발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이 대리가 담당하는 고객사와 회의를 할 때였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었던 회의실에서 고객사 팀장이 담배 한 모금을 빨고 연기를 내뿜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때 이 대리가 던진 한마디. “구수하네요.” 팀장은 멋쩍은 듯 웃더니 담배를 껐다.

이야기꾼은 무엇보다 잘 듣는 사람이다. 잘 듣고 있으면 언제 어떤 말로 이야기를 받아 넘겨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꾼들이 모였다. 대한항공 황재문 과장, LG전자 조재연 연구원, 쌍용정보통신 이정구 대리.(왼쪽부터)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 노력이 꾼을 만든다

이야기꾼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온 건국대 국문과 신동흔 교수는 1998년 발표한 한 논문에서 “이야기꾼은 ‘차별화된 고유의 레퍼토리’, ‘특화된 표현기술’, ‘남다른 장면묘사 능력’ 가운데 하나 이상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가 말하는 이야기꾼과 이들 4명의 이야기꾼은 성격이 좀 다르지만 신기하게도 이들은 그런 능력을 한 가지 이상 가지고 있다.

조 연구원은 자신의 레퍼토리에 제목을 붙인다. 그 중 하나가 ‘분뇨의 역류’다. 미국 영화 ‘분노의 역류’(원제: Backdraft)를 패러디했다. 90년대 초 친구들과 미국 플로리다에 여행을 갔을 때 호텔방 화장실 변기가 막히면서 분뇨가 넘쳐흐른 이야기다.

젊은 호텔 직원이 신식 기계로 뚫어도 안 되자 70대 할아버지가 고무로 된 전통적인 도구로 뚫었다면서 조 연구원은 갖은 의성어와 의태어를 활용한다. 직원의 어깨에 달린 무전기에서 나는 ‘칙칙’ 소리, 변기를 뚫을 때 나는 ‘푹푹’ 소리에 각각 인물의 ‘성대모사’까지.

이 대리는 “레퍼토리는 역시 자기 이야기”라고 말한다. 자신의 경험담이나 신변잡기를 창의적으로 변용한다. 황 과장은 “자기가 망가져야 된다”라고 표현했다.

데이트하던 여자가 “이 대리는 차가 없어서…”라며 그만 만나자고 한 것에 충격을 받은 이 대리. 시험을 속성으로 치를 수 있다는 전라북도 군산에 내려가 1박2일만에 운전면허를 땄다. 내용은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 대리는 여기에 ‘군산으로 가려고 새벽같이 모인 배낭 맨 젊은 운전면허 수험생들’, ‘1종을 따려다 시험장 벽을 들이받고 2종 오토매틱으로 바꾼 것’, ‘시험 전 필기시험용 문제집이 없어 애를 먹은 이야기’ 등 10여 가지의 장면을 넣어 풍부하게 구성했다. 창작을 한 것이다.

김 부장은 이야기를 꺼낼 때 고사성어를 많이 사용한다. 특히 병법을 풀어놓은 ‘36계’를 즐긴다. “성동격서(聲東擊西·동쪽에서 소리치고 서쪽을 공격하다)라고 했지요….”라는 식이다. 조 연구원은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길….”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기억 속에 담겨 있다가 적당할 때 등장하는 자신만의 표현구인 셈이다.

이런 능력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김 부장은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대화를 구성해 보기도 한다. 이 대리는 여러 상황을 연상하며 그에 맞는 표현을 여러 차례 연습한다.

○ 휴머니티

이야기꾼의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라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며 따뜻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꾸 다른 사람을 뭉개면서 대리 만족을 얻는 농담을 많이 하는데 저는 절대 안 합니다. 다 같이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야죠.” 황 과장의 말이다. 황 과장은 연말 모임을 주도하면서 정장차림에 앙증맞은 귀마개를 하기도 했고 빨간 내복을 겉에 입기도 했다.

김 부장도 다른 사람의 외모와 이름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는 삼간다. “물론 다른 사람에 대한 풍자나 비꼬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도 충분히 비꼴 수 있거든요.” 예를 들면 이렇다. “왜 기자를 하고 있습니까. 그 얼굴로 영화배우를 하지.”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한 화제가 그 다음이다. 자기의 잣대로만 이야기의 소재를 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김 부장에게는 정보통신(IT)업계에서 일하는 대학 동기들과의 모임이 있다. 그 모임에 나가기 전에 김 부장은 꼭 정보통신과 관련한 기본 상식을 숙지한다.

“모여서 대학 얘기만 할 수는 없잖아요. 제가 인터넷 비즈니스나 인간관계관리(CRM), 또는 C2C(개인 대 개인 거래), B2C(기업 대 개인 거래) 같은 전자상거래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고 기억에 오래 남지요. 자동차회사에 다니는 나를 위해 네가 먼저 자동차 이야기를 꺼내라는 식은 (이야기꾼의)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조 연구원의 이야기 철칙 중 하나도 모임에서 한두 사람이 참여할 수 없는 주제나 소재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하게 될 때에는 그 사람에게 배경 설명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험담보다는 미담을 한다. 그래서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되도록 피한다. 연말 모임을 썰렁하게 만들고 싶으면 정치 이야기를 하라고 당부한다. 김 부장은 “절대 피해야 할 소재”라고 했고 황 과장은 “누군가 정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구두 한 짝을 벗으라”고 주변에 충고한다. 그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에게 던지라는 것이다.

○ 구석에 앉은 사람에게

연말 모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이들이 주는 팁은 아주 간단하다. 자신감을 가지라는 것이다.

조 연구원은 “이야기는 마치 외국어 회화 공부와 같다”고 말했다. 문법이 틀리더라도 큰 소리로 자꾸 외국어를 말하면 느는 것처럼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좀 주제와 빗나가면 어떠냐는 것이다.

목소리는 큰 것이 좋을까? 김 부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3명의 목소리는 상당히 크다. 조 연구원은 팀이 회의를 하면 회의실 밖에 있는 사람도 다 알아들을 정도다. 이 대리는 “말소리 좀 줄이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황 과장은 “목소리가 크면 이점이 있다”고 하지만 필요조건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은 청산유수처럼 해야 될까? 이들은 가끔 자신이 달변인지, 다변인지 고민을 한다고 했다. 아무리 청산유수라도 듣는 사람들이 관심 없어하면 이미 이야기가 아니라 수다가 된다.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는 준비가 물론 필요하다. 내용은 물론이고 말하는 테크닉도 도움이 된다. 이 대리는 이를 위해 미국의 유명한 방송 진행자인 래리 킹의 ‘대화의 법칙’ 등 대화 관련한 책을 읽었다고 했다. 김 부장도 유머를 수록한 책 서너 권을 독파한 경험이 있다. 준비한 이야기가 먹히지 않는 분위기라고 판단이 되면 빨리 마무리 짓는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꼭 여분의 이야기 거리를 생각해 둔다. 김 부장의 표현대로 “전쟁터에 총만 갖고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따를 자신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구석에서 술만 들이켜고 있어야 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이야기를 잘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바로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좀 더 중요한 것이 듣기”라고 말한다. 너무 일찍 포기해서 서둘러 술에 취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흥미와 관심을 갖도록 해보자.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꾼으로 가는 첫발을 내딛은 셈이다. 게다가 연말은 내년에도 온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