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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 스케치]'황학동' 으로 본 청계천의 어제-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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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 스케치]'황학동' 으로 본 청계천의 어제-오늘

입력 2003-07-04 18:09수정 2009-10-1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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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고가도로와 복개 구조물은 종종 근대화와 경제 발전의 상징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면엔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 중구 황학동 중고벼룩시장.

4일 청계로를 찾았을 때 복원 공사로 인해 청계3, 4, 5가에 위치한 공구상가 조명기구상가 의류상가 등은 고객이 줄어 거리가 한산했다. 반면 황학동은 사람들로 붐볐다.

황학동엔 없는 것이 없다. 레코드판, 카메라, 낚시용품, 골프채, 장어와 자라, 도청장치, 군용품, 각종 헌책…. 이곳엔 종종 장물도 들어온다.

서울 청계천로 가운데 서민들의 애환이 가장 많이 서려 있는 중구 황학동 중고벼룩시장. 청계고가 철거 공사가 시작됐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박주일기자

분주한 틈을 뚫고 손수레를 밀면서 냉커피를 파는 할머니, 자라와 정력의 관계를 열심히 설명하는 중년 남성, 어제 산 다리미를 바꿔달라고 주인과 승강이를 벌이는 주부, 헌책방에서 패션 잡지를 구경하는 젊은 여성, 포장마차에서 콩국수와 막걸리로 더위를 달래는 할아버지….

청계천의 진면목은 바로 황학동에 있다. 분주함으로 오히려 애환이 더 짙게 묻어나고, 그 애환으로 인해 더 낭만적이기도 하다. 보는 즐거움과 사는 즐거움이 공존한다.

청계천 애환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 청계천 다리 밑은 거지들의 은신처였다. 당시 이곳의 거지들을 ‘땅꾼’이라 불렀다. 18세기 영조는 거지들에게 뱀을 파는 독점권을 주었고, 이때부터 뱀 잡는 사람을 ‘땅꾼’으로 부르게 됐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남산 북쪽을 장악하자 서울 사람들은 집값이 싼 청계천변으로 몰렸다. 농촌을 떠난 사람들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서 생활 여건이 악화돼 수인성 전염병 감염률이 전국 최고였다.

광복 후엔 월남민들과 피란민들이 모여들어 1950, 60년대에 판자촌이 형성됐다. 화장실도 없어 분뇨가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비가 오면 판잣집이 쓸려 내려갔고 날씨가 맑으면 화재가 발생했다.

1960년대 하천이 복개되면서 평화시장 세운상가 공구상가 광장시장 동대문의류타운 등이 들어섰다. 복개로 인해 청계3, 4가에 있던 고물상들이 밀려나기 시작했고 청계천의 끝자락인 황학동에 터를 잡았다.

황학동엔 실패한 사람이 많이 몰려든다. 그리고 이곳에서 재기를 꿈꾼다.

성인 비디오를 판매하는 한 중년 남성의 말.

“나도 한때 잘나갔었죠. 부도가 난 뒤 놀기 뭐해 여기서 비디오를 팔지만 제대로 된 비디오 대여점을 차리는 것이 내 꿈이라오. 청계천이 복원되면 이곳도 재개발될지 모르는데 그 때까지 가게 차릴 돈을 벌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삶의 체취가 풍기고 역동적인 공간의 하나인 황학동. 이곳은 외국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서울의 명소다. 황학동 중고벼룩시장이 사라지지 않고 청계천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공간이 되길 기대해본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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