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2인자]주군의 혀로 방패로…박지원·장세동의 영욕

  • 입력 2003년 7월 3일 16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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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권력은 무한한 데 반해 대통령이 누릴 수 있는 시공간은 폐쇄되고 제약돼 있는 구조가 한국정치에서 대통령의 뜻을 대리출납하는 2인자를 낳아왔다. 사진은 박지원(왼쪽) 장세동씨.동아일보 자료사진
대통령의 권력은 무한한 데 반해 대통령이 누릴 수 있는 시공간은 폐쇄되고 제약돼 있는 구조가 한국정치에서 대통령의 뜻을 대리출납하는 2인자를 낳아왔다. 사진은 박지원(왼쪽) 장세동씨.동아일보 자료사진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대북 송금 특검에 의해 구속됨으로써 ‘정권의 2인자는 반드시 구속 된다’는 최근 우리 헌정사의 ‘관행’에 또 하나의 사례를 추가했다.

5공의 장세동 전 안기부장, 6공의 박철언 전 의원, 김영삼 정부의 김현철씨 등 역대 정권에서 이른바 ‘2인자’로 꼽히던 인물들은 정권의 몰락과 함께 예외 없이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정권 2인자의 구속 사유는 모두가 재임시절 비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기되는 당연한 의문. 왜 모든 정권이 이처럼 문제 있는 사람들을 2인자로 중용하는가?

두 가지 이유로 분석된다.

우선, 2인자가 되면 불가피하게 손에 때를 묻혀가며 1인자의 방패가 돼야 할 상황이 생긴다. 요컨대, 2인자라는 자리 자체가 비리를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는 얘기다.

반면, ‘비리’를 포함해 1인자를 너무도 속속들이 알거나, 1인자의 심기에 정통하기 때문에 2인자가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2인자의 그 같은 속성은 구속된 역대 정권의 2인자들이 예외 없이 1인자의 오랜 측근이나 가족 친척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전자든 후자든 동전의 양면 같아서 결국은 매한가지.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5공 정권의 첨병을 자임했던 장 전 부장은 비교적 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군에 대해 충성을 다하다보니 비리를 저지르게 된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이에 비해 YS 때 대통령에 대한 보고 채널을 통제하면서 권력을 전횡했다는 얘기가 파다했던 김현철씨, DJ 말기 청와대를 완전 장악해 ‘대(代)통령’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리까지 들었던 박 전 실장은 비교적 후자에 가깝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인 것 같다.

●2인자들도 스타일 차이가 있다

대통령의 가족 혹은 친척이라는 특수 관계에 있었던 박철언, 김현철씨를 논외로 하면, 장 전 부장과 박 전 실장은 1인자와 남남으로 만나 우여곡절을 거치며 2인자로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동시에 대비되는 점도 많다.

실제 올 3월 대북 비밀송금 문제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한창일 때 정치권에서는 두 사람에 대한 비교론이 회자된 적도 있다.

민주당 동교동계 등을 중심으로 “김대중 정권에는 전두환 정권의 장세동 같은 사람이 없다”는 소리가 나왔던 것.

동교동계 최재승 의원은 “박지원씨는 DJ정부 내내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사람으로서 대북송금 문제가 터졌으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5공 비리 등과 관련해 세 번이나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주군’인 전 전 대통령의 문제는 끝내 함구했던 장 전 부장같은 ‘의연함’을 보여달라는 주문이었다.

이 같은 얘기는 당시 잠행을 계속하던 박 전 실장에게도 전해졌다고 한다. 박 전 실장의 한 측근은 “박 전 실장은 자신이 장세동만 못하다고 하는 데 대해 몹시 괴로워했다. 차라리 책임지고 감옥에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박 전 실장은 6월 16일 특검에 출두하면서 “문제가 있다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것이 민주당에서 비등했던 ‘장세동 론’을 의식한 언급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기왕 구속을 피할 수 없다면 ‘장세동 류’의 의리를 보여주는 게 낫다는 판단을 했음직하다.

박 전 실장은 85년 DJ의 미국 망명시절 지인의 소개로 DJ와 첫 인연을 맺었다. 92년부터 야당 대변인을 맡아 DJ의 ‘입’ 역할을 했으며 DJ 정부가 출범하자 대통령공보수석 문화관광부장관 대통령정책기획수석 대통령정책특보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거치며 마지막까지 DJ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야당 시절부터 그는 전날 아무리 술을 많이 먹어도 새벽 5시면 어김없이 DJ의 동교동 자택을 찾아 그날의 정치상황을 보고하는 부지런함으로 유명했다. DJ 정부 말기 ‘공공의 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았던 박 전실장이 계속 중용되는데 대해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은 “대통령이 적적해 한다. 말 상대가 필요하다”고 말하곤 했다. 특유의 부지런함과 ‘입안의 혀’같은 친화력이 박 전 실장을 2인자로 성장케 했다는 얘기다.

이에 비해 장 전 부장과 전 전 대통령의 관계는 공적인 측면이 강하다. 장 전 부장은 66년 월남에서 당시 연대장이었던 전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나 인연을 맺은 이후 12.12내란 사건 때 적극 가담했다. 5공통치 7년6개월 동안 대통령경호실장과 안기부장 등으로 전 전 대통령을 측근에서 보좌했고, 퇴임한 후에도 전 전 대통령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경호실장 시절 ‘심기경호’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만큼 1인자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와 전 전 대통령과의 사적인 관계설정 부분은 공사가 혼재돼 ‘한 식구’같은 인상을 주는 박 전 실장과 DJ의 관계에 비해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다.

●2인자는 왜 생기나

2인자의 문제는 절대 권력을 가진 1인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물론 권력이 제도적으로 분산된 체제 하에서는 2인자를 둘러싼 논란이 존재하지 않겠지만, 이는 이론으로나 가능한 일일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얘기다.

1인 중심 권력구조인 대통령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가장 오래된 대통령제 전통을 갖고 있는 미국에서도 대통령의 의중이 누구에게 실리느냐, 누가 대통령과 가장 가깝게 지내느냐의 여부가 워싱턴 정가의 최대 관심사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고려대 함성득(咸成得) 교수 등 대통령학 전문가들은 “대통령은 인사권을 통해 고위 공직자들의 생사여탈을 좌우한다. 뿐만 아니라, 예산안 및 법률안 제출권 등 행정권한도 대통령에게 있다. 그러니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대통령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대통령의 권력은 이처럼 무한한데 반해, 대통령에게 주어진 공간과 시간은 지극히 유한하다는 데서 2인자의 병폐가 싹튼다.

대통령과 만날 수 있는 기회와 인원이 제한되다보니 대통령의 의중을 ‘대신 출납’하는 사람이 등장하게 되고, 그 중에서도 특히 빈번하게 대통령을 접촉하는 사람이 2인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 청와대는 대통령과 비서진이 한 건물에서 근무하며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는 미국의 백악관과 달리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진 집무실이 떨어져 있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비서진도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본관에 가려면 사전 허락을 얻은 뒤 별도의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특별한 인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비서진조차도 대통령을 만나기가 어렵게 돼 있는 것이다.

DJ 정권 말기, 청와대는 대통령이 피곤해 한다는 이유로 그전까지 관례로 해오던 주요 수석비서관들과 비서실장의 대통령 관저 아침 회동을 없앴다. 대신 주로 박 전 실장이 그때그때 필요할 경우 대통령을 찾아가 보고하고 지침을 받아 나오는 일을 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들도 박 전 실장을 통하지 않고는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부처 장관들이 대통령을 만나 허심탄회한 얘기를 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2인자를 통해 대통령 의중을 대리 출납하게 되면 정보의 왜곡, 판단의 편향을 불러올 위험성이 크다. 그리고 거기서 2인자 병폐가 시작된다.

DJ 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다중으로부터 격리돼 있다보니 최측근 2인자의 판단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권력 2인자의 사심(私心)이 대통령의 의중으로 포장될 소지가 얼마든지 있다”고 설명했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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