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포석 人事의 세계]영화감독 임권택<中>

  • 입력 2003년 6월 17일 1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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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현장에서 연기지도를 하는 임권택 감독.-동아일보 자료사진
촬영 현장에서 연기지도를 하는 임권택 감독.-동아일보 자료사진
임권택(林權澤·67) 감독이 ‘장군의 아들’(1990)에서 한국형 액션 창조라는 목표 아래 발탁한 신인배우는 박상민 외에도 신현준, 김승우, 이일재, 송채환 등이었다. 이들은 이후 TV와 영화에서 주연급 배우로 맹활약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들은 목소리 연기만큼은 성우를 썼다. 동시녹음이 보편화돼 있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로는 대사 처리 능력이 떨어진다고 해서 김승우를 빼고는 모두 성우를 동원했던 것. 첫 편에서 성우를 쓰는 바람에 이들은 3편까지 이어진 속편 내내 성우를 써야 했다. 물론 성우를 쓴 후시녹음이 영화의 시대감각을 살려내는 데 일조를 하기는 했지만.

임 감독에게는 이처럼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안목과, 원석 상태의 재능을 보석으로 다듬어내는 장인의 솜씨가 숨어있었다. 그 비결을 묻자 그는 “그런 것은 논리의 세계가 아니라 감(感)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며 더 이상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가 있을 것 아닌가. 많으면 수백명까지 몰려드는 신인배우 캐스팅에서 그가 눈여겨보는 것은 무엇일까. 같은 질문을 몇 차례 되풀이 한 끝에야 답 비슷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그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배역의 이미지와 부합하느냐다. 아무리 연기력 좋고 인물이 좋아도 그 이미지와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두 번째는 “얼마나 영민하고 기억력이 좋은가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눈빛을 보면 대충 알 수도 있지만 즉흥적으로 질문을 던져놓고 그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 그 친구가 똑똑한지 아닌지를 바로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앞으로 두 발자국 갔다가 왼편으로 돌아서 세 발자국 가고 뒤로 돌아서 다시 한 발자국 갔다가 오른쪽으로 두 발 가 봐’라고 한 뒤 바로 ‘지금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다시 말해봐’라고 묻는 식이다. 대사를 외울만한 기억력을 갖췄는지를 살피는 것 못지않게 “얼마나 말귀를 잘 알아듣는지를 보기 위해서”라고 그는 덧붙였다.

임 감독에게는 그만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중요하다. 감독이 그리고자 하는 인물상과 배우가 이해하는 인물상 사이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서다. 그는 배우 곁에서 계속 자상하게 연기를 지도하는 감독은 아니지만 연기를 주문할 때는 상당히 구체적인 부분까지 명확하게 주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감독이 뭘 요구하는지를 배우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자꾸 얘기하고 요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배우는 거기에 맞춰 적응해나갈 수 있어요. 감독이 흔들리면 배우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배우가 감독의 말귀를 알아들어도 연기력이 따라오지 못할 때다. 특히 신인배우와 작업을 하다 보면 곧잘 이런 상황에 빠진다.

“그 배우의 능력과 한계를 빨리 파악해 포기할 것은 과감히 포기해야 합니다. 영화란 게 어차피 계속 붙잡고 있을 수는 없잖소. 그리고 나면 내 안의 것은 과감히 양보하고, 연기자 안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서 최대치를 끌어내는 거지.”

그래서 임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고함 한번 지르는 법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예외는 있는 법. ‘춘향뎐’(2000)에서 성춘향과 이몽룡으로 발탁된 이효정과 조승우는 임 감독에게 혼쭐이 났다. 두 사람이 춘향과 몽룡의 첫날밤 합방 장면에서 계속 NG를 냈던 것. 당시 열여섯, 열아홉살이던 두 사람으로선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임 감독으로부터 ‘그 나이 되도록 연애 한번 못해봤냐’는 뜻밖의 불호령을 들어야했다.

“애들이 무슨 죄가 있겠소. 이틀을 꼬박 촬영했는데 계속 NG를 반복해 촬영진 모두가 지치고 힘겨워하니까 그랬지. 그렇게 고함 한번씩 쳐서 촬영진 속도 후련하게 해주고 느슨해지는 촬영장 분위기도 다잡는 거지.”

그런 조승우도 이후 ‘후 아 유’와 ‘클래식’ 등의 주연을 맡으며 양동근, 조인성과 함께 올해 한국영화 남자배우 3대 기대주로 뽑힐 만큼 성장했다. (계속)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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