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 입력 2003년 6월 13일 17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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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507쪽 2만3000원 지식의풍경

1938년 3월, 나치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이후 독일의 영토는 팽창을 거듭했다. 체코 내 독일인 거주지인 주데텐을 합병한 뒤 이어 체코 전체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다음 단계로 폴란드의 단치히(그단스크)를 요구한 뒤 독일은 1939년 9월1일 폴란드를 침공했다. 폴란드의 동맹국인 프랑스와 영국과도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2차대전의 시작이었다.

이 모든 범죄는 언제 누구에 의해 기획 입안되었을까. 히틀러를 그 정점에 놓는 데는 이의가 없을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결산하기 위해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는 ‘호스바흐 메모’라는 문서가 제출됐다. 1937년 11월5일 히틀러가 제국의 요인들을 모아놓고 밝힌 ‘메모’에 인류를 상대로 벌인 2차대전의 계획들이 요약돼 있다는 것이다.

옥스퍼드대 역사학 교수를 지낸 저자는 이 정설을 파기한다. 그에 의하면 히틀러에게 ‘전쟁계획’이란 없었다.

오스트리아 병합은 히틀러가 정한 시점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수상인 슈슈니크가 국민투표를 계획하면서 위기가 조성되자 갑자기 찾아왔다. 프랑스 영국 등은 묻기도 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해왔다. 주데텐 병합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느낀 체코의 베네슈 대통령이 안절부절하다 위기를 조성했고,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직접 히틀러의 별장까지 날아와 병합을 승인했다. 단치히를 둘러싼 위기도 시작은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것은 영국의 입장이 강경론으로 변했으며 그것도 좋지 않은 시점에 변화했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과정에 히틀러는 예정된 계획 없이 상황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의 힘은 무력 자체가 아니라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엄포에서 나왔으며 그때마다 상대방이 알아서 요구를 들어주었다. 몽상가이기에 앞서 현실주의자였던 히틀러는 폴란드에서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어지자 끝까지 주저한 뒤에야 침공에 사인했다.

그렇다면 ‘호스바흐 메모’란 무엇일까. 오스트리아와 체코의 독일인을 독일 정부의 관할 아래 두고, ‘동방 배후지’에 독일인의 생존공간을 둔다는 등 모호한 내용은 히틀러가 창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독일 사회에 유행한 민족주의적 잡설들을 뭉뚱그린데 지나지 않았다. 이른바 ‘메모’가 나치의 핵심인물들에게 은밀히 알려진 것도 아니었다. 참석자의 대부분은 군비 충당을 강요받는 상공인층 출신의 고관들이었고, 그나마 얼마뒤엔 관직을 빼앗길 운명에 놓여있었다는 것.

저자의 관점을 얼마나 인정할지와 별개로 당시 유럽의 정세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얼마간 교훈을 준다. 엄포와 으름장으로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한 측은 원하던 것을 연이어 손에 넣었다. 상대측은 ‘파멸만은 피해야 한다’는 강박의식에 끌려다녔고 몇몇 나라는 자국의 운명 결정과정에서 소외됐다. 최후 단계에 이르러서야 정면대응이 선택됐지만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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