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6월 5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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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만남(3)

"범증(范增) 선생이 누구요?”

평소 몸가짐이 가볍지 않은 계포가 전에 없이 허둥대는 게 이상해 항량이 물었다. 계포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범증 선생은 거소(居巢)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뛰어난 재주와 학식으로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 나라에서 불렀으나 끝내 벼슬살이를 마다하고 여항(閭巷)에 섞여 살며 학문을 익히고 식견을 넓혔는데, 특히 천문과 지리에 밝고 그것을 세상일에 견주어 풀어 기묘한 계책을 짜내기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진시황이 천하를 아우른 뒤에는 기고산(旗鼓山)에 초막을 얽고 숨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어느덧 나이 일흔이 되었지만 젊은이 못지않게 기력이 좋고 품은 뜻이 커서 옛적 태공망(太公望) 강상(姜尙)의 풍도가 있다고 합니다. 진작에 폐백을 갖추어 찾아 뵈어야할 분이셨는데, 선생께서 되레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셨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장군께서는 먼저 의관을 정제하시고 공손히 선생을 맞아들이십시오.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든 들어주시고, 되도록 장군의 장하(帳下)에 남으시도록 붙들어 보십시오. 천 명의 좋은 장수보다 범증선생을 군사(軍師)로 모시는 것이 훨씬 더 든든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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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소에 그토록 대단한 분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공의 가르침을 따르겠소.”

항량은 그러면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범증을 들이게 했다. 그리고 어른을 뵙는 예로 범증을 맞은 뒤 윗자리를 권하면서 공손하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어떤 가르침이 내리시려고 저를 찾으셨습니까?”

별로 사양 없이 윗자리에 앉은 범증이 한동안 항량을 살펴보다가 불쑥 물었다.

“장군께서는 왜 진승이 패망한지 아시오?”

“불은 꺼지기 전에 반드시 한번 크게 타오릅니다. 진왕께서 가장 먼저 일어나셨고…. 진나라는 아직 여력(餘力)이 다하지 않아…. 진왕께서는 바로 그 진나라의 마지막 불꽃에 그을린 것이나 아닐는지요?”

항량이 조심으로 그렇게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범증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그 패망은 진승이 스스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진승은 망해 마땅한 사람이었소.”

“그 무슨 연유이신지….”

“육국(六國)이 모두 진나라에게 망했으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억울하고 한 많은 나라는 초나라일 것이오. 회왕(懷王)께서 무도한 진나라의 속임수에 빠져 잡혀가신 뒤 끝내 초나라로 돌아오지 못하시고 함양에서 돌아가신 지 70년이 지났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초나라 사람들은 그 일을 애통하고 분하게 여기고 있소이다. 그 까닭에 일찍이 남공(南公=초나라의 이름난 陰陽家)은 ‘초나라에 설령 석 집밖에 남아있지 않다 해도, 진나라를 멸망시킬 나라는 반드시 초나라일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소. 비록 진승이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에 맞선 공이 있다하나, 초나라 땅에서 일어났으면서 초나라 사람들의 한을 저버린 것은 큰 잘못이오. 초나라 왕실의 후예를 세우지 아니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어찌 그 세력이 오래 가기를 바랄 수 있겠소?“

“듣고 보니 선생의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진왕께도 허물이 없다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군도 다르지 않소이다. 장군이 강동(江東)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초나라 땅에 벌떼 같이 일어났던 장수들이 모두 다투어 장군에게로 몰려드는 것은 장군이 망국(亡國)의 한을 풀어주리라 믿어서 외다. 곧 장군의 가문은 대대로 초나라의 장수가 되어 초나라를 위해 싸웠으니, 장군도 조선(祖先)의 뜻을 이어 그리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오. 반드시 옛 왕실의 후예를 찾아 초나라를 되살려 주리라는 게 그들의 믿음이요 바램이니, 그걸 저버리면 장군 또한 진승의 전철을 밟게될 뿐이오!”

“미욱하나 선생께서 무엇을 제게 일깨워주려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받들겠습니다. 그밖에 제가 마음에 새겨 두어야할 일은 무엇인지요?”

그때만 해도 항량에게는 오중(吳中) 시절의 차분함과 빈틈없는 헤아림이 살아있었다. 겉으로는 한없이 겸손하게 대꾸하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범증을 살폈다. 강동에서 온 새로운 강자(强者)가 그렇게 흔연히 자신의 말을 받아들여 주자 신이 났는지 범증은 이번에는 거침없이 병법의 요체를 쏟아놓았다.

(이 사람은 흔해빠진 유세가(遊說家)들처럼 자신의 재주를 팔려고 나를 찾아온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진승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몇 마디 깨우쳐주러 왔을 뿐 써주기를 바라는 눈치는 전혀 없다. 아마도 나에게 빌 것이 없기 때문에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군막(軍幕)에 붙들어두려면 지금 매달려야 한다. 상대가 뜻하지 않은 곳을 치고 나가면[출기불의]쉽게 뜻을 이룰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이윽고 그렇게 헤아린 항량은 갑자기 범증의 발아래 무릎을 꿇으며 간곡하게 말했다.

“선생의 크신 가르침은 한마디 한마디가 죽백(竹帛)에 써서 남겨 둬야할 만큼 값집니다. 이제 제가 이렇게 엎드려 염치없이 비는 바는 오늘부터 저희들의 군사(軍師)가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부디 저희 군막에 머무시어 삼군(三軍)의 스승으로 저희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십시오. 선생의 크신 이름을 흠모하여 폐백을 갖추고 예를 다해 모셔오려 하던 차에 선생께서 몸소 이렇게 와주셨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인가 합니다.”

그러자 계포도 얼른 항량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그 곁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모든 게 제 불찰입니다. 상주국(上柱國)께서는 진작에 예물과 마련하고 수레를 내어 선생님을 모셔 오라 하셨으나 제가 게을러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제 게으름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상주국의 간절한 뜻을 받아주십시오. 저희를 가르치고 이끄시어 진나라 멸망의 날을 앞당겨주십시오.”

그러면서 군막 바닥에 머리를 짓찧었다.

두 사람이 갑작스레 그렇게 졸라대자 범증은 놀라고 당황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동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몇 번 사양하다가 마침내 그들의 청을 받아들였다.

“좋소이다. 초나라 왕실을 되 일으켜 세워 주신다면 초나라의 유신(遺臣) 치고 누가 감히 장군을 거역할 수 있겠소? 내 비록 늙고 어리석으나 힘을 다해 장군의 큰 뜻이 세상에 펼쳐질 수 있도록 하겠소. 다만 오늘은 이만 돌아갔다가 가솔과 작별한 뒤에 장군을 따르겠소이다.”

범증의 그같은 말에 항량은 크게 기뻐하며 계포를 기고산까지 딸려보냈다. 계포는 수레 가득 금과 비단을 싣고 가 그 가솔을 위로하는 한편 돌아오는 범증을 편히 모셨다.

범증은 기고산 초막으로 돌아간 뒤에야 퍼뜩 천명(天命)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날 밤 계포가 잠들기를 기다려 가만히 귀갑(龜甲)을 태우고 시초(蓍草)를 뽑아 보았다. 항량과 항우가 운세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들 중 하나에게 굵고 짧은 왕운(王運)이 있었으나 패역(悖逆)의 상과 함께였다. 거기다가 더욱 고약한 일은 자신은 그런 왕운마저 끝내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고 나온 것이었다.

(아뿔싸! 내가 경솔하였구나. 자잘한 감동으로 큰 일을 헤아리지 못했다….)

범증은 그렇게 뉘우쳤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옛말로 자신을 달래며 겨우 눈을 붙였다.

(거북껍질과 잡풀이 저 아득한 하늘의 뜻을 드러낸다한들 얼마이겠는가.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는 법. 그럴수록 내가 이들을 잘 이끌어 세상을 바로잡도록 해야한다.)

항량도 그런 범증의 심사를 헤아리기라도 한 듯 초나라 왕실을 되세우는데 정성을 다했다. 다음 날로 널리 사람을 풀어 민간 어딘가에 숨어있을 회왕(懷王)의 후예를 찾는 한편 옛 초나라 조정의 벼슬아치들까지 불러모았다. 그런 항량의 처사 또한 범증의 불만스런 심기를 적잖이 누그러뜨려 주었다.

그런데 항량의 군막에 든 지 열흘도 안돼 범증은 다시 항량의 운세와는 다른 방향으로 묘하게 불길한 예감을 건드리는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그날 점심나절 항량과 함께 양성(襄城) 싸움을 의논하고 있는데 군관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패공 유방이 돌아와 뵙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항량의 입에서 데려오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한 장수가 들어오는데 그를 본 범증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기이한 상이다. 모든 것이 넘치는 듯하면서도 텅 비었구나. 텅 비어서 오히려 천지 만물을 다 담아내는 우주처럼…. 눈 여겨 봐두어야 할 인물이다.)

하지만 그를 보는 항량의 눈길은 부드럽고 정이 가득했다.

“패공이구려. 풍읍을 되찾았다는 반가운 소문은 들었소만 어찌되었소? 공에게 들은 바로 미루어 보면 쉽지 않은 싸움이었을 텐데….”

항량이 그렇게 묻자 유방이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옹치(雍齒) 그 악물(惡物)이 사생결단으로 나왔으나 상주국께서 빌려주신 장수와 군사들의 용맹에 힘입어 풍읍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성이 사흘만에 떨어졌는데도 이렇게 늦은 것은 오래 나를 떠나있던 풍읍의 민심을 되 거두어들이느라 분주한 까닭이었습니다”

“그럼, 맺힌 한은 좀 푸셨소?”

항량이 약간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유방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맺힌 한이라니요?”

“지난번에 나를 찾았을 때는 이를 갈더니. 성이 떨어지면 풍읍의 군민(軍民)은 말할 것도 없고 짐승 한 마리, 풀 한포기 남겨두지 않을 기세였소.”

그러자 유방이 슬쩍 얼굴을 붉히며 히죽 웃었다.

“실은…. 그때는 울화가 치밀어 잠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옹치는 위(魏)나라로 달아나고 풍읍은 되찾았으며, 군민은 이미 내게 항복했는데 또 무슨 풀어야할 한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풍읍 사람들의 겁먹고 놀란 가슴을 달래기에 바빴습니다.”

너그러운 건지 속이 없는 건지 모를 대답이었는데, 그것도 범증에게는 유방이 가진 어떤 괴력(怪力)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항량과는 방향을 달리하는 힘, 항량에게 보탬이 되는 힘이 아니라 맞서게 될 것 같은 힘이었다.

(지금은 한 별장(別將)으로 항량을 따르고 있는 모양이다만 끝내 작은 못에 가두어놓을 수 있는 용 같지가 않구나….)

그 바람에 다시 의기소침했던 범증이 마음을 추슬러 자신을 왕자(王者)를 돕는 모사(謀士)요, 일군의 군사(軍師)로서 굳건히 자리매김 하게 되는 것은 항우를 만난 뒤가 된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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