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유행창조 바탕엔 해외체험-미적감각-인맥

  • 입력 2002년 12월 12일 16시 08분


《울트라트렌드세터들이 2002년 일반인에게까지 유행시킨 상품과 문화현상.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경쾌한 물방울 무늬가 돋보이는 지춘희씨의 2003년 봄, 여름 원피스, ‘인도풍 복장’이 드레스 코드로 제시된 패션인의 밤 파티 초대장, 테크노마린 시계, 미국 LA의 준보석 브랜드 ‘테리수’의 액세서리, 투스의 실크줄 액세서리, 정윤기씨가 스타일링한 드라마 ‘로망스’의 김하늘, 프랭크 뮬러 시계, 호면당의 오리엔탈 누들.》

유행의 속성은 ‘변화’다. 유행의 변화는 일정한 유행주기를 통해 나타난다.(그림 1) 유행은 소개→성장→성숙→쇠퇴의 사이클을 밟는데, 단계별로 ①유행혁신자(fashion innovator) ②초기 수용자(early adopter) ③유행추종자(follower) ④유행지체자(fashion laggard)가 있어, 심지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도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유행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이려는 욕구(차별성)에서 시작되지만, 이를 따르는 사람들과 똑같게 보이려는 욕망(동조성)을 타고 대중 사이에 빠르게 전파된다.

고급 소비재를 다루는 외국계 기업 마케팅 담당자들은 ‘수용자의 삼각형(Adopter’s triangle)’모델(그림 2)을 통해 유행의 전파과정을 설명한다. 생태계의 먹이 사슬처럼 피라미드형으로 그려지는 ‘수용자의 삼각형’의 꼭지점은 ‘아방가르드’층이다. 이들을 ‘울트라 트렌드 세터’로 분류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 아래로 △트렌드 세터 △유행 추종자 △유행을 타지 않는 층이 있다. 트렌드 세터와 유행 추종자 사이에 새로운 유행을 재빨리 받아들이는 사람들인 초기 수용자를 넣기도 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아방가르드’ 혹은 ‘울트라 트렌드 세터’로 꼽히는 사람들에게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해외 체류, 여행, 유학 등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체험했거나 △견고한 인맥 네트워크와 일정 수준 이상의 부(富)를 확보하고 있어 유행을 확산시킬 능력이 있고 △일반인보다 우월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이다. 삼성패션연구소 서정미 수석 연구원은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섞여 있고 유행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아방가르드’와 ‘트렌드 세터’의 역할이 ‘발명’보다 ‘발견’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스트리트 패션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6일 열린 한국소비자·광고심리학회 심포지엄에서 인천대 유혜경 교수(패션산업전공)는 논문 ‘한국인의 패션심리’를 통해 국내에는 진정한 ‘유행혁신자’가 없다고 지적했다. 외국의 디자인이나 트렌드 잡지, 외국 연예인들의 아이디어나 영감에 의존할 뿐 창의적 스타일을 개발하고 선도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가수 서태지의 경우도 서구의 여러 하위문화 스타일을 취사선택한 것으로 본다.

유 교수는 한국인이 특히 유행에 민감한 이유로 유교에 뿌리를 둔 집단주의 문화를 꼽았다. 집단의식이 나타난 대표적 예가 커플룩(couple look).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누구의 남자·여자친구라는 것을 밝히는 것에서 안정감을 얻고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첨단 유행이 뜨고 지는 현상에 대한 분석을 제시한 책 ‘티핑 포인트(The Tipping Point)’에 따르면, ‘뜨기’ 위해서는 ‘사회적 전염성’이 강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 이 전염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커넥터(connector)’라고 한다. 친구나 지인을 만드는 데 재능을 가진 소수의 커넥터들은 한 유형의 사람들을 많이 아는 것(변호사 10명)보다는 많은 유형의 사람들을 조금씩 아는 것(변호사 1명, 의사 1명, 정치인 1명 등)이 더 중요하다. 유행 파급 범위와 속도가 크고 빠르기 때문.

유행 확산에는 ‘커넥터’뿐만 아니라 ‘메이븐(maven)’의 역할도 필요하다. ‘메이븐’은 제품의 가격이나 품질, 최선의 구입방법 등 지식에 통달한 일종의 제품 마니아들이다. 결국 친구 없이 혼자 몰입하는 ‘중독자’보다는 주위 유력한 사람들에 대한 파급력을 갖고 있는 몇몇 ‘마니아’를 집중 공략하는 편이 기업 마케팅에 효과적이다. 한림대 부경희 교수(언론정보학부)는 “국내의 경우 인터넷의 영향으로 ‘커넥터’와 ‘메이븐’이 동일 인물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제품 사용 경험에서 나오는 분석 및 평가를 인터넷에 띄움으로써 다른 소비자들의 구매 행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런 전문소비자를 부 교수는 ‘프로슈머(prosumer〓professional+consumer)’로 정의했다.

미국 등에 비해 소비 시장 규모가 작은 국내의 경우 정상적 유행 사이클을 밟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점에 이른 트렌드가 쇠퇴기를 거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증발’해 버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 머천다이저나 디자이너들이 ‘기획된’ 다음 트렌드를 재빨리 끌어들임으로써 상종가인 유행만이 연속되도록 만드는 ‘냄비시장’의 특징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김현진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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