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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인생역정]가난속 숱한 좌절 ‘異端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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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인생역정]가난속 숱한 좌절 ‘異端의 길’

입력 2002-04-28 18:44수정 2009-09-18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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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후보는 흔히 3김 정치의 이단아(異端兒)로 불린다. 3김이 30여년간 두꺼운 지역주의의 성벽을 쌓아 올리며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할 때에 그는 이에 편승하지 않았고, 도리어 중요한 갈림길마다 이 장벽에 맞서왔기 때문이었다.

2개월 전까지만 해도 크게 주목받지 못한 대선 예비주자의 한 명에 불과했던 그가 ‘노무현 돌풍’을 일으키며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비상(飛翔)한 데에는 정치 입문 이후 14년간, ‘이단’의 낙인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온 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좌절이 더 많았다.

☞[화보]노무현의 일생역정

▼농협시험 낙방 막노동하기도▼

▽성장과정〓노 후보는 1946년 8월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서 10리쯤 떨어진 본산리에서 빈농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까마귀가 와도 먹을 게 없어 울다 돌아간다’고 할 만큼 척박한 산골마을이었다.

부모는 산기슭에 고구마를 심어 겨우 생계를 꾸려갔고 취로사업에 나가 받은 밀가루와 몇 푼 안 되는 돈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그래서 그의 어린 시절은 늘 가난에 대한 열등감으로 휩싸여 있었다. 노 후보 자신도 자전 에세이집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릴 때 나는 상당히 반항적이었고 한편으로는 열등감이 심했던 것 같다. 가슴에 한과 적개심을 감추고 있기도 했고, 쉽게 좌절하기도 했다.”

키가 작아 ‘돌콩’으로 불렸던 소년 노무현은 머리가 좋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여섯 살 때 천자문을 완벽하게 외워 마을에서 ‘노 천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렇지만 모범생은 아니었다. 반항아인 경우가 더 많았다.

3·15 부정선거 직전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작문과제를 내주자, 그는 반장이었지만 오히려 백지 동맹을 선동했다. 그 자신은 백지에 ‘우리 이승만 (택)통령’이라고 써냈다. 턱도 없다는 뜻이었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으나 그는 반성문 쓰기를 끝내 거부했다. 가세가 더욱 기울자, 그는 인문계 고교 진학을 포기한다. 대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생활비가 없어 친구집을 전전했다. 술과 담배를 배웠고, 성적도 뚝 떨어졌다.

뒤늦게 취직시험 공부에 나서 농협에 응시했지만 여지없이 낙방했다. 사회 진출의 첫발이 헛나간 데 따른 좌절감과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울산의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시의 꿈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 고시는 우울한 성장기를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무조건적 선택이었다.

71년 군 복무를 마친 뒤 고향 마을 뒷산에 토담집을 지어놓고 독학으로 시험 준비에 나섰고, 75년엔 결국 사법시험(17회)에 합격한다. 뒤늦은 나이에 고시에 합격한데다 고졸 학력 때문에 그는 사법연수생 시절에도 남들과 어울리기 어려웠다. 고향도 비슷하고 늦깎이도 비슷한 한나라당 안상수(安商守) 의원이 거의 유일한 벗이었다. 노 후보는 77년 대전지법 판사로 임관했지만 판사 생활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8개월 만에 변호사 개업을 했다.

▼인권노동 변호사로 활동▼

▽정치인 노무현〓81년 선배 변호사인 김광일(金光一)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소개로 부산지역 운동권 대학생들이 연루된 ‘부림(釜林)사건’ 변론을 맡기 전까지의 노무현은 ‘좀 잘나가는 변호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부림사건’으로 구속된 운동권들과 토론을 거치면서 당시 사회구조에 문제의식을 느끼게 됐고, 이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공동변론을 맡은 고 조영래(趙英來) 변호사와 교류하며 인권 노동변호사로 변해갔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건 87년. 당시 최루탄에 맞아 숨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李錫圭)씨의 사인 규명작업에 나섰다가 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된 사실이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되면서부터였다.

그는 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제의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한다. ‘여당의 센 사람과 붙겠다’고 고집해 부산 동구에 출마한 노 후보는 5공 신군부의 핵심인물이었던 민정당 허삼수(許三守) 후보를 누르고 국회에 진출했고, 88년 5공 비리 청문회에서 송곳 같은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가 된다.

90년 3당 합당은 그의 첫 정치적 시련이었다. 탄탄대로가 보장된 거대 여당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소수 야당의 길을 지킬 것인가라는 갈림길에서 노 후보는 주저없이 YS와의 결별을 택했다. 이후 DJ의 통합민주당에 합류한 노 후보는 DJ가 4번째 대권 도전을 위해 통합민주당을 깨고 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야권분열”이라며 합류 제의를 거부했다. 이로써 양김과는 완전히 선을 그은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DJ와 다시 손을 잡았다. 정권교체와 동서통합이 먼저라는 명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개혁노선은 상당부분 DJ의 것과 일치하고,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정치스타일은 YS와 닮은 대목이 많다. ‘머리는 DJ에게서, 행동은 YS에게서 배웠다’는 평가도 받는다.

▽대권 도전〓노 후보가 대권 도전을 현실 문제로 생각하게 된 것은 2000년 4월 16대 총선을 앞두고였다. 98년 7월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 당선돼 오랜만에 금배지를 다시 단 그는 16대 총선에서 부산 출마를 감행했다. 부산은 정치적 고향이었지만, 동시에 적지(敵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도박’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그의 ‘도박’은 조그마한 싹을 틔웠다. 인터넷을 통해 정치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라는 팬클럽이 조직된 것이다. 노사모는 2002년 4월 27일 잠실에서 ‘이단 노무현’이 한국 정치의 주류가 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냈다.

▼노후보 친인척 뭘하나▼

노무현 후보의 자녀는 1남1녀다. 아들 건호(建昊·29)씨는 95년 군 복무를 마치고 현재 연세대 법대에 다니고 있다. 한때 사법고시를 준비했으나 지금은 컴퓨터 분야에 뜻을 두고 전자공학을 부전공으로 하고 있다. 딸 정연(靜姸·27)씨는 2000년 2월 홍익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주한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두 자녀는 경선 기간 중 틈틈이 캠프 사무실에 나와 잔심부름을 했다.

한학을 했던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는 76년에,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는 98년에 작고했다. 노 후보는 다섯 남매 중 막내. 큰형 영현(英鉉)씨는 73년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둘째 형 건평(健平)씨가 가장 역할을 해왔다. 건평씨는 세무공무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부산에 살고 있는 큰누나 명자(明子)씨와 둘째누나 영옥(英玉)씨는 모두 남편과 사별했다.

장인 권오석(權五石)씨는 71년 옥사했다. 82세의 고령인 장모 박덕남(朴德南)씨는 남편과 사별한 처형 창좌(昌左)씨가 모시고 있다. 처남 기문(奇文)씨는 은행지점장이며 처제 진애(珍愛)씨는 자영업자를 남편으로 둔 주부이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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