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동아신춘문예/동화 당선작]「바람속 바람」…김지은

  • 입력 1997년 1월 2일 20시 02분


―시작의 작은 차이가 끝에 이르러 어마어마한 차이로 나타날 때, 날씨에서는 이를 「나비효과」라고 부른다. 북경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팔랑거리면, 다음달 뉴욕에서 태풍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제임스 글리크,「카오스―현대과학의 대혁명」 김포쓰레기 매립지입니다. 서울 서래가 먹다버린 무말랭이가 푸르뎅뎅하게 썩고 있습니다. 인천 인아가 신다버린 노랑구두는 맨들맨들 썩지않고 있습니다. 여기는 모든 썩거나, 썩지않는 것들의 무덤입니다. 꼭 하나, 쑥쑥 자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통배추 씨앗입니다. 일산바람이 스쳐간 자리에서 떡잎 한가닥이 땅을 밀고 올라왔습니다. 어느날 능곡 흰나비가 놀러왔습니다. 『아이쿠, 구려!』 서둘러 떠나려던 흰나비는 통배춧잎을 찾아내곤 반가운 마음으로 잎새 뒤에 알을 낳았습니다. 알은 꼼지락꼼지락 애벌레가 되고, 번데기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아기 흰나비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아유, 냄새야!』 뿐만 아닙니다. 눅눅한 바람은 더듬이라도 녹일듯 후텁지근했습니다. 숨이 막힌 아기 흰나비는 온힘을 모아 날개를 파닥였습니다. 그 날개짓으로부터 솜털바람이 일었습니다. 쓰레기 파수꾼 생쥐의 엉덩이를 간질였습니다. 생쥐가 뒷발을 움찔대자 새털바람이 일었습니다. 헌 타이어를 깔고 자던 도둑 고양이의 콧잔등을 간질였습니다. 「엣취」 솜털바람과 새털바람과 재채기는 한데 어울려 부드러운 강바람에 올라탔습니다. 촉촉한 안개에 얼굴을 닦으며 서울로 서울로 올라오던 강바람은 서울 문턱에서 자동차들의 검댕방귀를 맞고 달아나야 했습니다. 너른 들에 이르러서야 한숨을 돌린 강바람은 누렁소의 잔등을 쓰다듬어 주고 들바람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바다에 닿았습니다. 고깃배가 연거푸 회색 기침을 토해냅니다. 들바람과 고깃배의 기침은 짠물에 버무려져 바닷바람이 됩니다. 마침 높은 파도가 바닷바람의 따귀를 철썩 내리쳤습니다. 바닷바람은 돌개바람이 되어 파도의 손아귀에 휘감긴 채 넋을 잃고 떠밀려 갔습니다. 한참 뒤 눈을 뜬 곳은 고구마과자처럼 구불구불 줄무늬가 그려진 이상한 정류장이었습니다. 「바람의 나라―모든 바람들은 짝지어 교육을 받을 것. 명령을 어길 경우 바람 자격을 박탈함!」. 『넌 누구야?』 회오리바람이 빤히 노려보며 물었습니다. 『배추흰나비 날갯짓 바람이야. 쓰레기 매립지에서 태어났는데…』 『하핫, 쓰레기? 이 몸은 푸른 풀밭이 고향이시지. 풀밭을 두고 실랑이하는 투기꾼과 복덕방 임자의 입씨름 바람에서 나왔지만 말야』 그런데 머리 위에서 소나기바람의 굵은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나는 나랏돈을 야금야금 훔쳐내고도 시치미 뚝 떼는 큰도둑님 콧방귀 바람이시다』 짱짱하던 회오리바람도 한발 물러서며 말머리를 돌립니다. 『이왕 함께 갈 운명인데 우리 「귀신의 머리채」처럼 세상사에 길이 남을 사나운 태풍이 되는 게 어때?』 그때 태풍학교의 수레가 세 바람을 태우러 달려왔습니다. 수레에 오르자 선생님 말씀이 흘러 나옵니다 『나는 바다 선생님입니다. 여러분은 힘을 모아 태풍이 되는 겁니다. 먼저 이름을 지읍시다』 「팽그르르, 탁!」. 이름이 새겨진 팽이그림에서 던진 화살이 부르르 멈춘 곳은 「황소의 발길질」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넘치는 힘을 시험하고 싶군요』 소나기바람이 들뜬 목소리로 바다님을 재촉했습니다. 『요즘 부쩍 구정물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갑니다』 『본때를 보여줘야겠군』 회오리바람은 허리를 휘이 꼬았습니다. 그러나 돌개바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습니다. 『왜 무시무시하게 부수기만 하죠? 좋은 태풍이 될 수는 없나요?』 『좋은 태풍? 차라리 겁이 난다고 해』 소나기바람과 회오리바람이 비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겁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저는 부수는 바람보다 살리는 바람이 되고 싶어요』 돌개바람이 또박또박 다짐하자 바다님이 대답했습니다. 『부수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죠. 「황소의 발길질」에 담긴 뜻을 새겨보세요』 소나기바람과 회오리바람은 벌써 힘차게 바람개비를 돌립니다. 돌개바람도 엉겁결에 몸을 실었습니다. 드디어 「황소의 발길질」 태풍이 솟아오른 것입니다. 『지난 여름 공장 구정물을 쏟아낸 곳이군. 허리를 흔들면 장대비! 손발을 휘저으면 파도!』 소나기바람과 회오리바람은 태풍학교 교과서대로 외치며 허리를 흔들었습니다. 먹구름이 몰려들며 장대비가 쏟아집니다. 손발을 꼬는대로 파도가 몰아칩니다. 보다 못한 돌개바람이 뒷덜미를 당겨보았으나 삿대질만 되돌아왔습니다. 『뻘겋게 물든 바닷물이 안 보여?』 『물고기도 떠나버렸어. 말리지 마』 기운을 다 퍼부은 소나기바람과 회오리바람은 한쪽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차례가 된 돌개바람이 망설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아이의 훌쩍임 섞인 어머니의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어여 어여 가라앉소/바다님네 어르신네/김도 따고 굴도 따고/우리 아기 젖도 주게」 옛날 들바람시절 미루나무 잎새에 앉아 듣던 밭갈이 노래와 똑같은 가락이었습니다. 『황소의 발길질!』 돌개바람은 그제야 바다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황소의 발길질은 멀쩡한 외양간도 부수지만 언 땅을 골고루 쟁기질하여 씨앗터를 고르기도 합니다. 태풍도 마찬가지입니다. 묵은 삭정이를 날리고 고인 구정물을 헹구는 것이 참다운 일감인 것입니다. 돌개바람은 양손을 설렁설렁 흔들어 바다밑을 쟁기질했습니다. 붉은 띠와 끈끈한 기름을 걷어내고 새살 돋을 자리도 살폈습니다. 이튿날 호랑이를 닮은 그나라에서는 짤막한 뉴스가 흘러 나왔습니다. 『A급 태풍 「황소의 발길질」은 폭우를 동반하며 남부지방을 강타했습니다. 그러나 곧 C급 태풍으로 약화되면서 적조를 몰고 남해안을 빠져나가 먼바다에서 소멸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번 태풍으로 오염된 생태계가 활기를 찾을 수도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굴 양식으로 끼니를 잇는 어민들도 비로소 편안히 잠자리에 드는 모습입니다』 다시 김포 쓰레기 매립지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남쪽바닷가 마을로부터 실바람이 날아와 새똥 묻은 민들레 씨앗을 떨구고 잠들었습니다. 이듬해 봄이면 여기 쓰레기 더미 위에서도 남쪽마을 민들레가 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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