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성의 세상읽기]조금 걸어보니

  • 입력 1996년 10월 15일 06시 42분


눈이 시리도록 맑은 가을, 한적한 길이 있다면 그 길을 따라 거니는 호젓한 여유 를 부려보는 것도 좋으리라. 산을 오른다거나 하는 몸을 많이 움직이는 일보다는 천 천히 그러나 오래도록 가을 맛을 즐기며 걷는 것이 이 계절에 더 걸맞지 않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네 삶터에는, 특히 도시의 삶터에는 그렇게 거닐만한 길이 많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는 그런대로 한적한 길이 있어 자 주 산책을 나서곤 한다. 며칠 전 일이다. 무심코 거닐다가 길을 잘못 들어 어느 낯 선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가 한참을 헤맨 끝에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 입구에 세워진 육교가 문득 눈에 띄었다. 육교라면 교통도 복잡하고 길 도 막히고 하니 신호없이 사람 편하게 건너라는 물건으로만 여겨 온 우리 통념으로 는 제법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새로운 육교였다. 산비탈과 이어진 길을 가로지른 육교 계단 한쪽을 산비탈과 멋지게 어울리게 꾸며놓은 것이다. 그저 계단이 아니라 오르막 산책길처럼 만들어 풀과 꽃을 심어놓은 것이다. 나는 괜스레 설레는 마음으 로 그 길을 여러번 오르내렸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 사회도 이 육교처럼 기능적인 물건들을 이렇게 멋부릴 만큼 조금, 아주 조금은 여유가 생겼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 이 무척 흥겨웠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여유는 큰 것이다. 오로지 기능만 생각하고 효율만 따지는 세상에서 아주 조금의 여유, 그리고 작은 멋으로 어떤 때는 존재의 고단함조차 잊고 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껏 멋지게 차려입은 것보다는 일상적 인 옷차림에 사소한 한 두가지 부분을 신경써서 꾸미는 것이 훨씬 멋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또 외식도 번듯한 식당에서 비싼 음식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동네의 작지만 정갈하고 맛깔스런 음식으로 골라먹는 맛이 더 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늘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내는 가까운 사람들끼리 아주 작 은, 그러나 세심한 배려가 멋과 맛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아주 작은 여유를 누리기보다는 통큰 여유만 부리려 든다. 동네 치장이라면 보도 블록을 온통 그럴듯한 모양새로 뒤덮어야 하고, 옷차림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비싼 것으로 감싸야 하고, 외식도 북새통을 이루는 비싼 식당이나 뷔페에서 해야하고, 눈에번쩍 띄는 선물을해야한다고난리들이다. 이런 생각에 발길 닿는대로 다른 산책길로 거닐던 나는 무심코 아파트들만 모인 우리 동네 저편에 백 층이 넘는 초현대식 건물이 들어선다는 벌판이 바라보이는 곳 에 섰다. 그 곳에 내 아주 작은 여유를 기리는 소박한 마음을 비웃듯이 우뚝 솟을 건물을 상상해보다간, 문득 그나마의 내 여유가 불쌍해져 그만 슬며시 돌아섰다.정 유 성(서강대교수·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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