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벤져스’(가수 ‘유산슬’을 탄생시킨 주역들을 영화 ‘어벤져스’에 빗댄 표현)라는 별명으로 방송가를 종횡무진 누비는 황혼의 예능 새내기들이 있다. 바로 ‘박토벤’ 박현우(78)·‘정차르트’ 정경천(72) 작곡가와 ‘작신’(작사의 신) 이건우(60) 작사가다. 작년 9월 MBC ‘놀면 뭐하니?’에 혜성처럼 나타나 각 방송사를 넘나들며 맹활약 중이다. 겉보기엔 그저 입담 좋은 아저씨들 같지만, 사실 이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산실’로 통하는 실력자들이다. 각자 경력을 모두 합한 138년에 작업 곡만 5000여곡. 제목만 쭉 늘어놓으면 1970년대 이후 대중가요사가 될 정도다. 각기 40여년 동안 음악이란 한 우물만 파다 뒤늦게 예능프로그램에 뛰어든 세 사람의 ‘롤러코스터’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박토벤’ 박현우 김태호PD, 사람 보는 눈 있어 하하! 트로트 열풍 기뻐…다양성 존중해야
‘정차르트’ 정경천 예능 종횡무진…남은 건 ‘런닝맨’뿐 잘려도 그만, 할 말 다했더니 인기
‘작신’ 이건우 음악짬밥, 합해서 ‘138년+5000여곡’ 최고의 곡? 우리가 함께 만드는 그 곡!
박현우·정경천 작곡가와 이건우 작사가를 만나기 위해 19일 찾아간 서울 동대문구 남예종예술실용전문학교 앞. 여러 대의 카메라 삼각대와 각종 촬영 장비가 늘어서있었다. 이날 한 예능프로그램 촬영이 있을 것이라 귀띔했던 이 작사가는 “막 끝났다. ‘나이스 타이밍’”이라며 웃었다. 소파에서 쉬던 박 작곡가와 정 작곡가도 지친 기색 없이 “사진은 어디서 찍을까?”라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포즈를 취하면서는 즉석 상황극도 펼친다. 그야말로 ‘프로 방송인’이다.
“이 사람아. 우리 이래봬도 예능인 2년차야. 하하하!”
● “인기 비결? 눈치 안 보기!”
- 요즘 많은 예능프로그램에 함께 출연 중이다. 방송 활동을 해보니 어떤가.
정경천(이하 정) : “‘놀면 뭐하니?’에 유산슬(유재석의 트로트가수 활동명)과 출연한 후 러브콜이 엄청 쏟아졌다. MBC ‘라디오스타’ ‘복면가왕’, KBS 1TV ‘아침마당’ 등에 나갔고, 라디오 방송도 했다. 웬만한 건 다 했네. 안 나간 건 SBS ‘런닝맨’ 뿐이다. 나가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박현우(이하 박) : “신기하게 우리가 나가면 시청률이 ‘따블’(2배)로 뛴다. 트로트신동 특집으로 출연한 MBC ‘편애중계’(2월28일·3월6일)가 그랬다.”
이건우(이하 이) : “나는 종종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어 처음엔 두 형님을 걱정했다. 하지만 웬걸! 형님들이 훨씬 잘 하시는 거다. 타고 나신 것 같다. 어떻게 참고 사셨지?”
정 : “우린 작곡 안 했으면 예능 했을 거야.”
- 젊은 시청자들도 열광한다. ‘예능 잘하는 법’을 알려 달라.
이 : “최근의 트로트 열풍과 시기가 잘 맞았다. 무엇보다 두 형님은 눈치를 안 보신다. 베테랑인 유재석이나 김구라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 다 한다. 그게 통하지 않았나 싶다.”
정 : “우리는 작곡가와 작사가라는 본업이 있다. 방송에선 잘려도 그만이지.(웃음) 그런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하니 저절로 매력이 나오는 것 같다. 즐겁게 촬영하는 것도 비결이다. 방송이 생각보다 재밌다. 계속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박 : “자고로 다이아몬드는 늦게 발견되는 법이다. 우리를 캐낸 ‘놀면 뭐하니?’의 김태호 PD, 그 양반이 사람 볼 줄 안 거다.”
세 사람은 ‘놀면 뭐하니?’를 통해 얻은 ‘박토벤’, ‘정차르트’, ‘작신’의 별칭으로 불린다. 음식점에 가면 밥값을 안 받으려는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는 일도 흔하다. 이들을 이렇게 만든 일등공신은 단연 유산슬이다. 박 작곡가가 10여분 만에 작곡하고 정 작곡가가 편곡, 이 작사가가 노랫말을 쓴 ‘합정역 5번 출구’는 이들의 새로운 효자곡이 됐다.
- 마침 유산슬이 컴백을 준비 중이다.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
정 : “겪어보니 정말 좋은 점이 많은 사람이다. 단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2집도 함께 했으면 하는 거다. ‘시청률 따블’ 원하면 불러 달라.”
박 : “‘합정역 5번 출구’ 때에는 연습 시간이 부족했다. 못내 아쉽다. 이번엔 시간을 더 투자하라. 분명 훌륭한 가수가 될 것이다.”
이 : “타고난 재능은 있는데 바쁘다보니 여러 장르에 도전하지 않는 것 같다. 랩, 발라드에도 도전했으면 좋겠다. 유산슬! 할 수 있어!”
● “우리의 히트곡, 아직 안 나왔다”
- 많은 노래들을 작업했다. 음악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정 : “고등학생 무렵 시작했다. 공부는 싫고, 음악은 하고 싶고. 음악 책만 보면 잠이 안 오는 거라. 천직이다 싶어 외길만 팠다.”
박 : “중학교 때부터 음악을 했다. 평생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27세부터는 바이올린 연주자로도 활동하면서 돈을 벌었다.”
이 : “중학생 시절 무렵 작사가의 꿈을 가졌다. 21세에 같은 동네에 사는 전영록을 만나 ‘종이학’을 썼다. 이후로 ‘꽃길’만 걸은 행운의 사나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위기도 많았다. “옛날엔 저작권 개념이 없어 작곡·작사비를 못 받기 일쑤”였다. 트로트를 경시하는 대중문화계 분위기와 ‘트로트는 어른들만 부르지’라는 젊은이들의 편견과 외면에 위축될 때도 있었다. 그런 순간에도 이들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음악을 향한 자부심” 덕분이었다.
- 요즘 후배 가수들의 기세가 무섭다. 어떻게 보나.
정 : “우린 ‘천재’가 아니라 노력파다. 반면에 젊은 친구들은 천재들이 많다. 리듬감도 훨씬 좋다. 자랑스럽다. 하지만 우리도 우리대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
박 : “후배들에게 배울 점도 많지만 음악이란 연륜이 필요한 장르다. 그 점에서는 우리를 못 따라오는 부분이 있을 거다. 우리는 어떤 경지에 올랐다. 길 가다가도 악상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작곡한다. 우리가 보낸 세월의 힘이라 믿는다.”
- 트로트 장르에서도 인기를 모으는 후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트로트가 인기를 이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 “가수는 많지만 곡을 공급할 작곡가와 작사가는 거의 없다. 젊은 친구들의 귀가 팝과 대중음악에 편중된 탓에 옛 노래처럼 주옥같은, 완성도 높은 트로트를 기대하기 힘든 현실이다. 이제 막 이름을 알린 가수들의 신곡이 기대에 못 미치면 대중은 돌아설 것이다. 양질의 작곡가와 작사가를 발굴하는 데 힘 쓸 때라고 본다.”
박 : “비슷한 노래들이 자꾸 나오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해 달라.”
- 즐거운 인생의 변화를 만끽하고 있는 것 같다. 혹시 또 다른 꿈이 있다면.
박 : “노래를 만드는 사람이니 당연히 좋은 곡을 남기는 게 마지막 꿈이다.”
- 그렇다면 ‘내 인생 최고의 곡’은?
박·정·이 : “오늘 밤 우리가 함께 쓰는 그 곡이 최고의 히트작이 될 거다. 아직 보여줄 게 많다는 뜻이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