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이웃을 위하여 20선]<18>행복한 고물상

  • 입력 2009년 1월 5일 02시 57분


◇행복한 고물상/이철환 지음/랜덤하우스

《“아버지는 산동네에서 아주 조그만 고물상을 하셨습니다. 고물상 이름은 ‘행복한 고물상’이었지요. 이 책은 아버지가 ‘행복한 고물상’을 하시던 시절의 따스하고 눈물겹고 아름답고, 그래서 못 잊을 추억으로 남은 내 유년의 삽화들을 조각조각 모아놓은 것입니다. 바라건대 보잘것없는 나의 이야기가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작은 불씨로 남아 한밤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는 데 춥지 않고 외롭지 않도록 길동무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가난하지만 따스했던 달동네 추억

먹고사는 게 쉽지 않았던 시절, 산동네 사람들의 일상은 다양한 사연으로 가득했다.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눈물과 감동을 자아내는 산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저자는 ‘행복한 고물상’을 중심으로 따스하게 그려냈다.

고물상에는 손님들 말고도 껌을 파는 사람이나 동전을 구걸하는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정이 많은 아버지는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열 살 조금 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남동생과 함께 껌통을 들고 고물상 입구에 나타났다. 아버지는 주저하는 아이들을 억지로 데리고 들어와 연탄불에 라면 한 그릇을 끓여 먹였다. 아이들이 돌아간 뒤 아이들이 앉았던 방석 아래서 껌 세 통이 나왔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몇 시간을 팔아야 할지도 모를 귀한 껌 세 통을 감사의 표시로 두고 간 것이었다.

하루는 고물상에 세워둔 아버지의 소중한 자전거가 없어졌다. 며칠 뒤 학교 후문에서 솜사탕을 파는 아저씨의 자전거가 저자의 눈에 들어왔다. 안장에 녹이 슨 모양새며 오른쪽 페달 반쪽이 떨어져나간 것이 아버지의 자전거가 분명했다. 아버지와 함께 확인하러 도착했을 때 솜사탕 아저씨는 아기를 업은 아주머니와 차가운 길바닥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 자전거가 분명한데도 아버지는 “우리 자전거가 아니다”며 발길을 돌렸다. 얼마 뒤 함박눈이 내리던 날, 아버지의 자전거가 고물상 마당에 돌아와 있었다. 뒷자리에는 비닐봉지에 담긴 사과가 놓여 있었다.

하루는 군복을 걸치고, 한쪽 팔에 갈고리 손을 한 초라한 행색의 사내가 고물상에 들어왔다. 베트남전에서 손을 다쳤다는 사내는 할머니에게 다짜고짜 밥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태연하게 밥을 내 주는 할머니.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운 사내가 트림까지 해대며 대문 밖을 나설 때 할머니는 찐 고구마 봉지를 사내의 성한 손에 건넸다. 그러고는 “내 막내아들도 월남에서 죽었다”고, “세상 그렇게 원망하며 살지 말라”고 당부한다. 다음 날 저녁 고물상 나무 의자 위에 찐 옥수수 두 자루와 종이쪽지가 놓여 있었다. “할매, 어젠 정말 고마웠소.”

해마다 12월이 되면 아버지는 고물상 마당에서 아이들이 가지고 놀 만한 것들을 골라 세탁하고 손질했다. 아버지는 손질한 장난감들을 국화빵 장사를 하는 할머니에게 한 달 내내 갖다 날랐다. 할머니는 국화빵을 사러 오는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갖다 준 장난감 비행기나 곰인형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내줬다. 가난한 산동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라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줬던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동네를 달동네라고도 불렀다. 엄마에게 혼난 뒤 골목길에 나와 울던 여자아이, 훌렁 벗은 아랫도리로 골목길을 뛰어다니던 사내아이들, 흘러간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며 언덕길을 오르던 술 취한 아저씨들…, 눈 감아도 눈시울 적시는 달동네의 그 따스했던 풍경들이 아슴아슴하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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