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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⑫]금성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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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⑫]금성평사

입력 2002-06-27 18:29수정 2009-09-17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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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암 월드컵경기장과 월드컵공원 등이 들어선 난지도(蘭芝島) 일대의 262년 전 모습이다. 원래 이곳은 모래내와 홍제천,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드넓은 저지대라서 한강 폭이 호수처럼 넓어지므로 ‘서호(西湖)’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곳이다. 따라서 이 세 개천과 대안의 안양천이 실어오는 흙모래는 늘 이곳에 모래섬을 만들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난지도가 이렇게 생긴 모래섬인데 그 모양은 홍수를 겪을 때마다 달라져서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여 일정치 않았던 모양이다. 오리섬(鴨島)이니 중초도(中草島)니 하는 이름들이 난지도의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도 이 모래섬이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현상일 것이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인 영조 16년(1740)에는 난지도가 이렇게 강 가운데로 깊숙이 밀고 들어온 모래섬들의 집합체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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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19년에 펴낸 경성지도를 보면 난지도는 서호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하나의 큰 섬으로 합쳐져 있다. 이 모습은 1970년대 중반까지 크게 바뀌지 않아 신촌 쪽으로 모래섬에 밀린 샛강이 반달처럼 에둘러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드넓은 물가 모래밭이었기에 겸재는 ‘금성평사(錦城平沙·금성의 모래펄)’라는 제목으로 이 일대의 한강을 싸잡아 그려놓았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 ‘금성의 모래펄’이라 했을까. 이는 난지도로 모래를 실어오는 모래내와 홍제천 사이에 금성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모래섬 뒤로 보이는 마을터가 금성산일 것이다. 이 산을 금성산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종(재위·1506∼1544) 때부터다. 충청병사를 지낸 김말손(金末孫·1469∼1540)이 본래 강 이쪽 양천 두미에 있었던 금성당(錦城堂) 불상을 강 건너로 쫓아보냈기 때문에 한양 모래내 쪽 강가 야산에 금성당이 세워지고 금성산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모셔진 석조불상이 나주 석불의 신령이 옮아붙었다 해서 나주의 별호인 금성을 당호로 삼은 것이다. 김말손은 무과에 급제한 인물로 말 타고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났는데 금성당 불상이 영험이 있어 부근을 지나는 길손이 이곳에 재물을 바치고 기도하지 않으면 재앙을 입는다는 속설 때문에 백성들이 시달림을 받게 되자 이 같은 일을 감행했다. 이렇게 해서 금성산이 난지도 뒤 모래내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금성평사’라 했던 것이다. 그 금성산이 있던 자리가 지금의 성산동이다.

성산동 쪽으로는 잠두봉(절두산)에서 망원정(望遠亭) 금성당에 이르는 한강 북쪽 강변의 경치를 모두 그리고 그 뒤로 노고산, 와우산 등을 그려놓았다. 양천 쪽으로는 선유봉, 증미, 두미를 거쳐 탑산과 양천현아 곁의 소악루(小岳樓)까지 그려냈다. 양천현 뒷산인 성산(城山· 궁산 또는 파산)에서 바라다본 시각이다.

이런 아름다운 풍광이 1970년대부터 크게 변한다. 1977년 3월에 성산동에서 강 건너 양화동까지 성산대교가 놓이기 시작하고 1978년에는 난지도에 쓰레기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성산대교는 1979년에 완공되었고 난지도 쓰레기장은 15년 동안 쓰레기가 쌓여 거대한 산을 이루었다. 그 결과 샛강이 메워져서 난지도는 육지가 되었고 마침내 2002년 5월에는 쓰레기산에 월드컵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밤낮없이 차량의 물결이 물밀듯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성산대교 이쪽저쪽의 소란스러운 모습과 돛단배들이 한가롭게 지나고 있는 겸재 당시의 이곳 모습을 비교해 보면 상전이 벽해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비단에 채색한 23.0×29.4cm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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