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있게한 그 사람]임지호 자연요리연구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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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것 탐내지 마라”… 사람의 도리 가르치신 아버지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나는 무엇인가? 주워 왔다는 수군거림을 들으면서 자랐고,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집을 뛰쳐나오기 일쑤였던 어린 시절. 홀로 나를 키우던 생모는 세 살 난 나를 친부에게 맡기고 떠났다. 많은 아이들이 일정한 시간이 되면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보곤 했다. 그들과 닮지 않은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나는 무엇인가?’ 수도 없이 생각했다. 온갖 오물덩이로 가득 찬 보따리라고만 스스로를 여겼던 시절이었다.

열한 살에 처음 가출했다. 얼마 뒤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 후 수시로 집을 들락날락하게 됐다. 가난 때문이었을까, 방랑벽 때문이었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 없다. 집을 나와선 산속에서 잠을 자기도 했고, 비바람을 피해 동굴에서 기거하기도 했다. 슬픔, 눈물, 울분으로 가득 찼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서양철학이 있었고, 셋째 누님의 가르침이 있었으며,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것이 삶의 소중한 지표가 됐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집을 나갔다 돌아온 내게 삶의 지혜와 방법을 가르쳤다. 첫째, 남의 물건은 티끌 하나도 탐내지 마라. 둘째, 남의 집에서 일을 할 때는 주인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라. 셋째, 조상에게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하지 마라. 아버지가 일러주신 이 세 가지 가르침을 지금도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담백한 삶을 사신 분이었다. 한의학을 공부하신 아버지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면서도 돈을 받지 않았다. 가난한 생활에도 아버지는 맑은 정신을 잃지 않았으며,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실천하신 분이었다. 자연에 대한 내 마음은 아버지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와 나무를 하러 다닌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는 내게 “자연의 모든 재료가 생명을 살리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고 일러주곤 하셨다. 자연스럽게 나도 자연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갖게 됐다. 힘든 시절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자연을 통해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알려주신 아버지 덕분이다.

나를 각별히 아껴주신 셋째 누님도 나를 있게 한 사람이었다. 가출을 일삼던 10대 시절, 출가한 누님에게 찾아가면 누님은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셨다. “험한 욕을 하지 마라. 네 삶이 그렇게 된다. 아름다운 생각을 해라. 그러면 네 마음이 아름다워진다. 훌륭한 사람의 모습을 항상 가까이 해라. 그러면 너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된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이 말씀이 내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을 고백한다. 나를 사랑해주는 누님이 자랑스러워하는 멋진 동생이 되고 싶은 마음도 삶의 동력이 되었다.

열여섯 살 넘어서는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외국에 가겠다고 밀항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래도 고생한다고 생각 안 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돌아보니 험하고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을 통해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인지, 부끄러운 인생이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었다. 방랑 중 길바닥에서 수많은 거지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에게 왜 그렇게 됐냐고 물어봤고, 그렇게 안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봤다. 그때 이 얘기를 들었다. 한 가지 기술을 배워두라는 것, 그 기술이 너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것. 사회로부터 버려진 그들은 나의 교과서였으며 소중한 스승이었다.

떠돌던 10대에 나는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연히 서점에 들르면서부터다. 철학책을 읽고 싶었다. 니체와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독서가 로마사 러시아문학 등으로 넓혀졌다. 조금이라도 돈을 벌면 책을 샀다. 아르바이트생으로 식당에서 그릇을 닦으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어린 녀석이 무슨 저런 어려운 책을 읽느냐고, 이해나 하겠느냐고 주변에서 비아냥거려도 꿋꿋이 읽었다. 책이 내게 큰 기쁨을 주듯 나로 무언가로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주고 싶었다. 그때 읽은 책들은 음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익힌 내 삶의 거름이 됐다. 지금 생각하면 평생의 보석을 챙긴 것이었다. 그때 얻은 내용과 사상이 지금의 나의 삶이니 말이다.

임지호 자연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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