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위한 윤리 강령쯤은 헌신짝처럼 내던진 은행들[광화문에서/유재동]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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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경제부 차장
유재동 경제부 차장
이번 파생결합펀드(DLF) 대량손실 사태에서 피해자들이 가장 많이 분통을 터뜨리며 하는 말은 “은행에서 팔기에 안전한 줄 알았다”, “차마 은행이 이럴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은행이라는 곳은 증권사나 저축은행 같은 다른 금융회사에 비해 더 신뢰할 만하다는 뿌리 깊은 관념이 있다. 피해자들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은행 직원이 권하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가입 신청서에 서명을 했다고들 말한다. 이들이 금전적인 손실과는 별개로 심리적인 충격과 배신감도 유난히 크게 느끼는 이유다.

우리가 은행을 안전하다고 믿게 된 것은 금융회사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와 관련이 깊다. 만약 누군가가 은행을 통하지 않고 직접 돈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다면 높은 이자를 요구할 수는 있을지언정 돈을 떼일 위험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은행이 이 위험을 대신 떠안아준 덕에 우리는 안전하게 예금 이자를 받으면서 여윳돈을 굴릴 수 있다. 보험사 역시 가입자에게 보험료를 걷는 대가로 삶에서 마주할 수 있는 여러 위험을 대신 보장한다는 점에서 은행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 결국 금융회사의 본질은 고객의 리스크를 줄이고 자산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선량한 관리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에서 은행들이 ‘선량한 관리자’는커녕 오히려 고객의 위험을 조장하며 돈을 버는 ‘카지노 주인’의 역할을 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은행이 판매한 DLF란 상품은 예·적금보다는 높은 수익률을 제시하지만 자칫 시장 상황에 따라 원금을 전부 날릴 수도 있는 초고위험 상품이다. 투자자가 이런 위험에 노출된 것과 반대로 이 상품을 설계하고 판매한 금융회사는 고객 돈의 1∼2%가량을 수수료로 꼬박꼬박 떼어 갔다. 고객에게 손실 위험을 전부 다 떠넘기면서 앉은자리에서 기회비용도 따로 없는 무위험 수익을 즐긴 것이다. 저금리로 인해 마진이 계속 줄어드는 은행엔 이만한 효자 상품도 없었을 것이다.

금융당국 조사에 의하면 은행들은 DLF 판매를 마치 군사 작전하듯 밀어붙였다. 본사 위원회 심의 과정에서 상품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나왔지만 해당 위원을 교체하면서 가볍게 묵살했다. 각 점포도 지점 평가나 인사 고과에서 점수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상품에 문제 있으니 판매를 재고하자”는 현장의 목소리쯤은 지점장의 실적 압박 속에 바로 묻혔다. 일부 은행 PB들은 이 상품이 ‘금융위기 같은 쇼크에도 안정적’, ‘손실 확률은 0%’라고 광고해 팔았고, 은행 측은 이런 케이스를 우수 사례로 선정해 다른 지점들에 전파했다. 이런 허위과장 마케팅에 낚였다가 목돈을 잃은 고객들은 “은행이 사기를 쳤다”며 울분을 토하고 있다.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는 은행들의 홈페이지에는 소비자 보호를 위한 강령이 명시돼 있다. 고객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소비자에게 적합한 상품을 권하는 것을 최우선 행동기준으로 삼는다는 내용이다. 은행들은 회장, 행장이 나서서 이에 대한 선포식을 열고 직원들에게 윤리 서약을 받는다는 홍보 자료를 수시로 뿌린다. 그게 한낱 쇼였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세상이 다 알게 됐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은행#dlf#파생결합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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