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무미건조한 리듬으로 읊조리는 실험적 문장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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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한유주 지음/228쪽·1만3000원/문학과지성사


“한 문장도 쓸 수가 없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문장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능력만큼은 상실하지 않은 것 같다. 한 문장도 쓸 수가 없다는 문장만큼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러니 앞의 문장은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견딜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한 문장도 쓸 수가 없다는 문장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단편 ‘한탄’에서)

점점 늪에 빠져드는 착각이 든다.

한 작가의 소설집 ‘연대기’는 문장마다 부비트랩이 설치돼 있다. 딱히 폭발하진 않는다. 피 흘리는 외상은 없다. 근데 피해가기 힘들다. 겨우 몇 줄 읽다가 허우적거린다. 또 몇 페이지 넘기다 고꾸라진다. 어떤 단편은 도대체 뭘 읽은 건지 몽롱해진다.

이게 작가의 의도라면 참으로 얄궂다. 물 한 통 없이 사막을 마주했다고나 할까. 해갈이 급선무인데 피부가 먼저 타들어간다. 소설 8편이 아니라, 기나긴 서사시 8마디를 읽은 기분. 그렇게 시집(?) ‘연대기’는 모래가 돼 스르륵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무미건조한 리듬의 촉감만을 남긴 채.

“아무도 나의 행복을 염탐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의 불행을 염탐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도 나를 염탐하지 않았다.”(단편 ‘일곱 명의 동명이인들과 각자의 순간들’에서)

그래서인가. 시로 펄떡거리던 소설은 문득문득 에세이로도 폐부를 찌른다. 상처와 적의를 함께 드러내고, 봉합과 방치를 구분하지 않는다. 딱히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속박을 불편해한다. 그저 퍼덕거리다가 웅크리다가. 이런 비릿한 생경함을 만나는 건 언제나 반갑고 고맙다.

다만 한 작가로 특정할 수 없는 아쉬움도 입가에 맴돈다. 이 정서, 그리 낯설지 않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연장선이랄까. 그들은 부정하겠지만, 출구 없는 지식인의 침잠은 이제 좀 식상하다. 기껏 내러티브를 지웠다지만 그 역시 벌써 정형화한 종착역이 아닐는지. 언제까지 우리는 ‘하수구’만 들여다봐야 할까. 이제 좀 청명한 바람에 땀도 식히고 싶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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