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문 패권 프레임의 착각[오늘과 내일/정연욱]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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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좌파 원로회의 훈수 일축한 친문패권
‘중도는 없다’는 오만·독선에 역풍 불 수도

정연욱 논설위원
정연욱 논설위원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야권연대를 했다. 지금의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의 전신인 양당이 선거 공조를 선언한 것이다. 당시 정책연대 합의문에는 양당과 함께 제3자의 서명이 들어갔다. 진보좌파 성향의 원로들이 모인 ‘원탁회의’의 높은 위상을 보여줬다. 이들은 색깔이 다른 두 정당의 연대가 정체성 혼선으로 번질 가능성을 차단하는 병풍 역할을 했다.

8년이 지나 원탁회의 원로들이 다시 전면에 나섰지만 이번엔 퇴짜를 맞았다. 정치개혁연합(정개련)이란 범여권 비례연합정당을 만들어 민주당의 퇴로를 열어주려 했는데 거부당한 것이다. 정개련이 여당의 원격조종을 받는 위성정당에 머물지 않고 독자적 활동에 나설 가능성을 내비치자 여당이 등을 돌린 것이다. 친문 성향이 짙은 여당 지도부의 행태에 원로들은 격분했다. 그러나 목표를 잃은 정개련은 해체의 길을 걸어야 했다.

여당이 선택한 플랫폼 정당은 이름조차 생소한 ‘시민을 위하여’였다. 원탁회의 원로들과 달리 친문, 친조국 색채가 짙은 이들이 주축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더불어시민당’은 무늬만 비례연합정당이었을 뿐 여당이 비례후보 인선을 좌지우지한 사실상 ‘비례민주당’이었다.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 집어넣은 몇몇 군소정당이 ‘종갓집’ 여당의 지시를 거스르긴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여당과 ‘더불어시민당’은 주변 시선을 살피고 있지만 제2의 비례정당인 열린민주당은 대놓고 친문, 친조국 인사들을 비례후보로 추천했다. 강경 친문, 친조국 지지층을 더 끌어낼 수 있는 전략이라고 한다. 딱히 미래 비전, 공약이라고 내세울 것은 별로 없고 문재인 정권과 조국 수호 메시지가 핵심 가치다.

며칠 전 더불어시민당 비례 1번이 지난해 조국 일가에 대해 “특혜를 받는 좋은 집안 사람들의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비판한 사실이 알려지자 친문, 친조국 지지자들은 “(조국) 장관님한테 열등감 있느냐”고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진보 진영의 차별화된 의제로 자부하던 공정과 정의의 가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적과 동지’의 이분법에 기반한 피아(彼我) 구분만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패권주의’다.

물론 이런 공세가 아무런 계획 없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 나름 ‘중도는 없다’는 전략적 판단이 깔려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투표율 하락이 예상되는 데다 원내 1, 2당이 전면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중도·무당층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근거를 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조국 사태에 주눅 들거나 위축된 핵심 지지층이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만 조성되면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다. 가차 없이 적을 내치고 동지를 철저히 감싸는 도널드 트럼프식(式) 선거전술에 가깝다.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이런 공격은 더 거세질 것이다.

그러나 선거 표심(票心)은 일방의 생각이나 희망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한쪽이 승기를 잡은 듯하면 상대 진영은 위기감을 느끼며 결집하는 경향을 보이기 마련이다. 동시 진행형이다. 2000년 16대 총선 당시 여권이 남북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알리며 승기를 굳히려 하자 야권 지지층은 위기감을 느끼며 대거 투표장에 나와 반대표를 던졌다. 결과는 야당의 승리였다.

조국 사태 당시 범진보 진영의 내부 이탈은 가속화됐다. 대통령이 ‘마음의 빚’이 있다고 한 조국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커지면 조국 이슈가 부상하고, 염증을 느끼는 반대 표심이 뭉치게 된다. 중도·무당층이 움직일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중도가 없다’는 건 친문 패권주의 프레임의 착각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더불어시민당#조국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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