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짧게 내일은 길게”… 근무시간 조정, 오후에 유모차 산책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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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돌려주세요]<13·끝>스웨덴 최대은행 SEB 가족친화정책

지난달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시내에서 한 부부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함께 걷고 있다(왼쪽 사진). 스웨덴 최대 은행 SEB는 다양한 유연근무제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식사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같은 날 오전 11시 SEB의 직원들이 이른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구내식당에서 음식을 고르고 있다. 스톡홀름=유성열 기자 ryu@donga.com
지난달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시내에서 한 부부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함께 걷고 있다(왼쪽 사진). 스웨덴 최대 은행 SEB는 다양한 유연근무제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식사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같은 날 오전 11시 SEB의 직원들이 이른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구내식당에서 음식을 고르고 있다. 스톡홀름=유성열 기자 ryu@donga.com
《 지난달 10일 오후 1시. 스웨덴 스톡홀름 시청사 인근 공원. 평일 낮인데도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남성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유모차를 벤치 옆에 두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남성들도 있었다. 5개월 된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길을 걷던 한 30대 남성은 “오늘은 아내가 늦게까지 일하고, 나는 오전 근무만 하는 날”이라며 “서로 일을 하는 시간에 따라 육아를 분담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 3시를 넘기자 아내와 함께 유모차를 끌고 나온 남성들이 더 많아졌다. 오후 4시가 되자 일터에서 퇴근한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와 번화가와 버스, 전철을 가득 메웠고, 한 시간 뒤 해가 완전히 저물자 스톡홀름 시내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스톡홀름 시민들의 저녁은 회사와 시내가 아닌 가정에 있기 때문이다. 》

○ 고령자들도 일할 수 있는 회사

스웨덴 남성들이 육아와 가사에 적극 참여하고, 저녁에는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웨덴 정부는 근로자들의 육아휴직과 출산휴직, 육아휴직 급여 등을 법으로 엄격히 보장하고 기업들 역시 가족 친화 정책을 적극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출산과 육아, 근로자의 행복을 위해 국가와 기업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히 스웨덴 최대 은행인 SEB는 스웨덴식 가족 친화 문화를 가장 잘 구축하고 있는 기업으로 꼽힌다. 1856년 창립한 SEB는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등 20여 개국에서 400만 명의 고객을 둔 글로벌 금융회사다. 전 세계적으로 1만6000명의 임직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9000여 명이 스웨덴에서 근무하고 있다. 연간 순이익이 2조 원대에 달하며 세계 500대 기업에 단골로 꼽히는 은행이다.

SEB는 이런 외형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가족 친화 기업으로 더 유명하다. SEB 인사부 관계자는 “우리의 인사 정책은 근로자들의 경력 단절을 막고, 좀 더 편안한 근무 환경을 마련해 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직원 행복이 1순위”라고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유연근무제다.

학업, 간병, 육아, 출산 등 개인의 목적에 따라 근무 방식을 다양하게 고를 수 있다. 특히 전일제 직원들도 개인과 가정의 여건에 따라 특정 요일에 단시간 근로를 하고, 다른 요일엔 장시간 근로를 하는 방식으로 주당 근로시간(38.5시간)을 채울 수 있다. 여성은 물론 남성 직원도 출산, 육아기에 단축 근무를 할 수 있으며 또 언제든지 전일제 근무로 전환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전체 직원의 54%가 여성이다.

두 아이의 엄마로 SEB를 다니고 있는 엠마 엘리아슨 씨(36)는 오전 8시에 출근해서 오후 2시에 퇴근하는 근무(하루 6시간 근로)를 하고 있다. 그는 “경력이 단절되지 않으면서도 오후와 저녁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점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스웨덴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일단 부모에게 총 480일의 휴직이 주어진다. 부부가 240일씩 나눠서 써도 되고, 한 명이 더 많이 써도 되지만 다만 그 차이가 60일 이상 벌어지면 안 된다. 남성 육아휴직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다. 또 남성이 육아휴직을 하면 급여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설계돼 있기 때문에 남성들도 육아휴직을 적극 사용할 수 있다. 대면 업무가 적은 부서는 굳이 회사로 출근하지 않고, 재택근무도 할 수 있다.

특히 SEB는 고령 직원들에 대한 배려 역시 철저하다. 페테르 안데르손 씨(62)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4시 반에 퇴근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 저녁에는 주로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스톡홀름 외곽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파티를 즐긴다. 주당 근로시간의 80% 정도만 근무하고 저녁과 주말은 온전히 여가활동에만 쓰고 있는 것. 안데르손 씨는 “예순을 넘은 나이지만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며 “그렇다고 무리하게 일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아내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기 위해 단축 근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직원들의 정신 건강까지 챙겨주는 회사

SEB는 직원들의 정신 건강까지 챙겨주는 복지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직원들이 우울증 등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과 계약을 맺고 있는 것. 직원들은 회사가 계약한 의사들을 통해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고, 개인의 상담 내용과 치료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또 세금을 내면 자동 가입되는 건강보험 외에 회사 비용으로 개인보험도 따로 가입해준다. 정신건강의학과 치료 역시 보험에 포함돼 있다. 본인이 원할 경우에는 가족도 추가할 수 있다. 매년 봄가을 두 번씩 ‘헬스 위크’를 열어 △스트레스 관리하는 법 △건강히 몸을 관리하는 법 △잘 달리는 법 등 건강 관련 서비스와 세미나, 각종 정보를 직원들에게 제공한다. 월급과 별도로 체육활동을 위해 1년에 50만 원 정도를 지원하기도 한다.

SEB 관계자는 “모든 인사 정책과 복지 제도는 부모와 가족을 중심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가족 친화 정책이 잘 정착되려면 서로를 신뢰하는 조직문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가족친화정책 10년만에 병가 비율 5%→1% 급감”▼

인사책임자 피카르도 “복지는 투자”


“금융은 ‘사람’이 핵심 가치입니다. 인재들을 더 끌어모으기 위해서라도 가족 친화 정책을 더욱 확대해야 합니다.”

SEB의 인사책임자 잉엘라 스트룀 피카르도 씨(사진)는 가족 친화 정책을 구축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한국에서는 근로자들에 대한 복지를 비용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많다.

“비용이 아니라 투자로 봐야 한다. 우리도 10년 전만 해도 병가를 내는 비율이 5.2%나 됐다. 이유를 분석해보니 장시간 근로와 스트레스 등이 주된 이유였다. 그래서 직원들의 건강관리에 적극 나섰고, 가족 친화 정책을 대거 도입했다. 현재는 1%도 되지 않는다. 투자를 통해 비용을 줄인 것이다.”

―적게 일하면서도 높은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일정한 기준만 주고, 그 안에서는 자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한 뒤 결과만 평가해야 한다. 우리는 누가 강요하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다.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는 시간 역시 노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와 친목 도모, 동기 부여 등의 과정으로 봐야 한다. 수평적인 조직문화 역시 생산성 향상에 필수적이다.”

―수평적인 조직문화는 어떻게 구축할 수 있나.


“SEB에서 5명 이상의 부하 직원을 둔 책임자는 상향 평가를 받는다. 독특한 점은 상향 평가 미팅 같은 것을 열어서 결과를 직접 발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상향 평가에서 제기된 문제점들을 가지고 부하 직원들과 토론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만약 상향 평가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면 책임자를 다른 부서로 보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상관은 본인의 문제를 개선하고, 부하 직원들 역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문화가 구축된다.”

―육아휴직이 긴 편인데 복직 후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나.

“육아휴직 기간이라고 해서 회사와 완전히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자유롭게 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고, 업무 관련 정보를 받아볼 수도 있고, 담당 매니저와 지속적으로 연락하면서 업계 상황을 파악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직원은 복귀를 앞두고 이런 과정을 거쳐 적응력을 키운 다음 복직한다. 업무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다.”

―중소기업들이 SEB처럼 복지제도를 운영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당연하다. 규모가 작은 기업이 우리처럼 복지제도와 가족 친화 정책을 운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업 경영진의 의지다. 근로자들이 안정된 가정 속에서 행복을 느껴야 기업도 성장한다. 이런 철학만 있다면 방법은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

스톡홀름=유성열 기자 ryu@donga.com
#스웨덴#스톡홀름#SEB#가족친화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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