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한 반려견 ‘보리’와 50대 비혼 카피라이터 누나의 16년 ‘동고동락’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7일 16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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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한 반려견 보리와 16년을 동거한 비혼의 카피라이터 최현주 씨. 최 씨는 “자기만의 고독을 즐기는 보리와 동고동락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고 말했다. 최현주 씨 제공
시크한 반려견 보리와 16년을 동거한 비혼의 카피라이터 최현주 씨. 최 씨는 “자기만의 고독을 즐기는 보리와 동고동락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고 말했다. 최현주 씨 제공
#1. “강아지는 사람들에게 애교를 피우고 응석을 부려야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보리는 자립심 강한 강아지가 어떤 모습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 실천력이 하도 굳건해 내가 다 서운할 정도였다. 녀석은 잠시 나와 놀아주다가 귀찮아지면 아예 다른 방으로 건너가 혼자만의 고요를 즐겼다.”
시크한 반려견 보리는 올해 16살로 인간으로 치면 90세가 넘는 고령이다. 보리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본 책 ‘반려견문록’이 최근 출간됐다.  최현주 씨 제공
시크한 반려견 보리는 올해 16살로 인간으로 치면 90세가 넘는 고령이다. 보리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본 책 ‘반려견문록’이 최근 출간됐다. 최현주 씨 제공

#2. “누나가 나를 혼낼 때 처음엔 나도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고스란히 듣고 있었어. 나중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지. 그래서 그냥 침대 밑으로 쏙 도망갔어. 누나는 침대를 향해 화를 내더니 어느 날 정말 내가 숨을 수 없는 다리가 없는 침대로 바꿔버렸어. 하지만 괜찮아. 그땐 누나도 나도 나이가 들어서 웬만해서는 서로 싸우지 않게 되었거든.”

‘시크’한 강아지 보리와 비혼(非婚)의 누나가 한집에 살며 벌이는 아옹다옹한 풍경이다. 몸무게 3kg도 안 되는 요크셔테리어 보리. 곡식을 의미하는 보리가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위로는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에서 따온 이름이다. 인간을 따르며 꼬리를 흔드는 여느 반려견과 달리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고 사색을 즐긴다. 소심한 듯 보이지만, 덩치 큰 개들 앞에서도 주눅 드는 법이 없다. ‘착한 개가 되기보다는 내 의견을 말하는 개가 되기로’ 결정한 당돌한 강아지다.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최현주 씨(51)는 일반적인 견주들처럼 반려견의 ‘엄마’가 아닌 ‘누나’가 되길 원했고, 그렇게 보리와 16년째 동거 중이다. 최 씨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집에서 개, 새, 고양이 등을 기른 덕분에 동물을 좋아했다. 보리와 만난 건 2004년 겨울. 보리는 이미 두 번이나 주인이 바뀐, 한 살 된 강아지였다.

최 씨는 그런 보리와 수시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번번이 지는 쪽은 사람이었다. 간식 없이 약 먹이는데 실패하고, 침대 한가운데 누운 보리에 밀려나 한쪽에 웅크리고 자야 했다. 사고를 치거나 말썽을 피우진 않지만 자아가 유독 강한 ‘프로불편러’ 보리. 그런 반려견을 순하게 교육시키는데 실패한 어리숙한 누나. 둘은 서로를 길들이려다가 결국 각자의 언어를 이해하고 서로를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최 씨는 최근 보리와의 동고동락, 알콩달콩한 일상을 엮은 ‘반려견문록’(엑스오북스)을 발간했다. 그는 인도, 몽골, 부탄 등을 여행하고 ‘그 여자 인도여행’ ‘두 장의 사진’ 같은 책을 썼고 3번의 개인전 경력도 있는 사진가다. 그는 1년 전부터 오랜만에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했는데 “장기 출퇴근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소개했다.

최 씨는 “광고와 홍보업무를 하며 공감과 소통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보리와 가족으로 살면서 오히려 공감과 소통에 대해 배웠다. ‘반려견문록’은 다른 언어와 다른 시간대를 사는 개와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책에는 사람과 반려견이 상대의 삶을 짚어보고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이 각자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보리는 올해 열여섯 살이 됐다. 사람 나이로는 90대 고령이다. 그동안 큰 병 없이 건강했지만 지난해 여름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 배뇨, 배변에 문제가 생겨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거리고 실수가 잦아졌다. 다행히 아직은 약물치료만 받고 있는 중이지만, 수술 불가 판정을 받은 터라 완치를 기대할 수는 없다.

최 씨는 “보리가 고집이 세다지만 사실 내 성격도 그렇다. 이상하게 내가 아프면 보리도 아프더라. 개는 주인을 닮는다는 말에 공감한다”며 “조금쯤 고독하고, 적당히 고단하며, 충분히 따스한 함께로 지내는 보리와의 이별은 아직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시크한 반려견 보리와 16년을 동거한 비혼의 카피라이터 최현주 씨. 최 씨는 “자기만의 고독을 즐기는 보리와 동고동락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고 말했다. 최현주 씨 제공
시크한 반려견 보리와 16년을 동거한 비혼의 카피라이터 최현주 씨. 최 씨는 “자기만의 고독을 즐기는 보리와 동고동락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고 말했다. 최현주 씨 제공

최 씨는 헤어지는 자리에서 자신의 휴대전화에 있는 보리의 최근 사진들을 보여줬다. 세월의 흔적 속에 함께 포즈를 취한 둘의 얼굴은 정말 많이 닮아 있었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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