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父 잠들다” 눈물에 잠긴 싱가포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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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國父’ 리콴유 타계/이설 특파원 현지 르포]
지금의 싱가포르 있게 해준 당신”… 거리-공관-병원앞 추모인파 가득

이설 특파원
이설 특파원
“지금의 싱가포르를 있게 해준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가 지난달 5일부터 폐렴으로 입원해 머물렀던 싱가포르종합병원 앞에 수북이 쌓인 추모 카드에 적힌 글귀다.

나라의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안정의 기틀을 세워 ‘국부(國父)’로 존경받는 리 전 총리가 향년 92세로 타계하자 국민들은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다”며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다. 싱가포르종합병원과 가족 장례식이 치러질 총리 공관, 정부가 마련한 분향소 앞에는 시민들이 가져온 꽃이 차곡차곡 쌓였다. 거리 곳곳엔 늦은 밤까지 추모 발길이 이어지고 관공서마다 조기(弔旗)가 내걸려 도시 전체에서 장례식 분위기가 배어 나왔다.

싱가포르 총리실은 23일 오전 성명을 내고 “리 전 총리가 오늘 오전 3시 18분(한국 시간 오전 4시 18분) 세상을 떠났다. 평화롭게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리셴룽(李顯龍) 총리가 슬픈 마음으로 전 국민에게 알려드린다”고 발표했다. 리 총리는 리 전 총리의 장남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23∼29일 7일간을 애도 기간으로 정했다. 국장(國葬)으로 치러질 장례식은 29일 오후 2시 싱가포르국립대 문화센터에서 열리며 이후 시신은 화장된다.  
▼ “재임때 공관 비운채 소박한 삶… 고인돼서야 오셨네요” ▼

‘눈물에 잠긴 싱가포르’


23일부터 이틀간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의 가족 장례식이 치러지는 이스타나 대통령궁 내 총리 공관인 ‘스리 타마섹’ 앞에는 이날 오전부터 수백 명의 시민이 몰려들었다. 새벽에 발표된 리 전 총리의 타계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고인의 시신이 운구되는 모습이라도 보겠다며 궁 바깥으로 몰려들었다. 아들인 리셴룽(李顯龍) 총리와 며느리이자 총리 부인인 호칭 여사도 오전에 궁에 도착했다. 호 여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스타나 궁 정원 잔디 위 안개도 이별을 고하는 것 같다’고 적었다.

리 전 총리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가 다가오자 기다리고 있던 시민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거나 “고마워요. 리콴유”를 외쳤다. 운구 행렬이 공관 안으로 들어가자 길에 죽 늘어서 있던 사람들은 정문 앞에 다시 모여 정부가 비치한 방명록과 추모 카드에 애도 메시지를 쓰고 꽃다발을 놓았다. 이날 오후 8시까지 정문 앞에서만 1만1000여 개의 추모 카드가 만들어졌다.

밤이 되자 추모객들은 더욱 늘어났다. 오후부터 공관 앞에 모여든 시민들은 일렬로 줄을 지어 리 전 총리를 조문했다. 대부분 검은 양복과 검은 원피스를 입었고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리 전 총리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부 노인들은 조문소 앞에서 “아버지(Father)”라 부르며 울기도 했다. 이곳을 찾은 오잉후아 씨(68)는 “리 전 총리는 생전에 이곳 총리 공관에서 살지 않았다. 죽어서야 왔다”며 눈물을 훔쳤다.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로 선출된 1959년 “내 아이들을 집사와 청소부가 있는 특별한 환경에서 키우지 않겠다”며 공관 사용을 거절했다. 이후에도 1965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연방에서 독립할 때 안전 문제로 잠깐 머무른 것 외에는 주로 외국 귀빈을 접대할 때만 이용했다.

리셴룽 총리도 현재 공관에 살지 않는다. 그는 이날 오전 8시(현지 시간) 부친의 타계를 공식 발표하는 TV 연설을 통해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 국민에게 자랑스러운 국가 정체 의식을 불어넣었다”며 “우리는 앞으로 그와 같은 인물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싱가포르 자체였다”고 말했다. 그는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등 3개 언어로 연설을 하면서 슬픔이 북받치는 듯 수차례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러면서 “건국 총리 리콴유 선생, 편안히 쉬십시오”라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이날 공관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토니 탄 싱가포르 대통령과 고촉통 전 싱가포르 총리,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 리카싱 청쿵그룹 회장 등이 다녀갔다. 공관 내부에 안치된 리 전 총리의 관은 하얀 꽃들로 장식됐다. 상주인 리 총리는 검은색 바지와 흰색 티셔츠 차림으로 직접 조문객을 맞았다.

리 전 총리가 마지막으로 머무른 싱가포르종합병원 앞에도 추모객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싱가포르 당국은 25일까지 탄종파가르, 앙모키오 등 시내 중심가 18곳에 분향소를 추가로 설치할 예정이다. 택시 기사인 존 폴림 씨(53)는 “싱가포르의 엄청난 변화와 리 전 총리의 리더십을 직접 겪은 우리 세대나 부모 세대는 너무 상심이 크다”고 말했다.

리 전 총리의 타계와 동시에 싱가포르 정부가 만든 추모 홈페이지(www.rememberingleekuanyew.sg)는 이날 오전 접속자가 크게 몰린 탓인지 한때 작동이 중지되기도 했다. 여기에는 고인이 부인 콰걱추 여사와 젊은 시절 데이트하면서 찍은 사진, 현지 시찰을 하며 찍은 사진 등 생전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올라 있다.

많은 싱가포르 시민들은 추모 홈페이지와 리 전 총리 트위터, 싱가포르 총리실 페이스북 등을 오가며 추모 메시지를 남겼다. 한 시민은 그의 죽음이 발표된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의 사진을 올려두고 “이 시간을 그에게 바친다. 그는 위대한 인간이었다”라고 적기도 했다.

외국인들도 “현대사의 거인이 쓰러졌다”며 깊은 애도를 표시했다. 공관 앞 분향소를 찾은 일본인 교사 모리야마 씨(46)는 “한 국가의 정치를 자신만의 철학으로 그만큼 밀어붙인 이가 없다는 점에서 리 전 총리는 대단한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발표된 직후부터 이날 오후 11시까지 리 전 총리를 언급한 전 세계 트윗과 리트윗은 19만 건을 넘어섰다.

싱가포르=이설 기자 snow@donga.com
#리콴유#싱가포르#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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